<편집자주> 본지는 8일(월)‘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3월 한 달간‘금녀의 벽을 뚫은 여성 인터뷰 시리즈’를 연재한다.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분야에서 활약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한국기술센터 5층에 위치한 한국산업기술미디어문화재단 이사장실 안. 인하대 최숙자 교수(인하대 화학공학과·75년졸)가 직원 1명과 상담을 시작한다.

“이 조직에서 개선돼야 할 점, 필요한 점은 뭐라고 생각하나요?”,“직원의 활발한 활동을 위해 내가 뭘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한국산업기술미디어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지 4개월로 접어든 최숙자 교수는 재단의 특성과 보안점, 직원들의 업무를 파악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를 16일(화) 이사장실에서 만났다.
한국산업기술미디어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최 교수는 한국 산업기술과 중소기업을 세계에 알리는 임무를 맡았다.

“우리 산업기술을 지상파, 인터넷, 라디오 등 미디어를 이용해 알릴 겁니다. 각 컨텐츠에 따라 어떤 미디어를 사용해야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는 것이 저의 일이죠.”

이사장이라는 타이틀 뒤에 항상 인하대 화학공학과 교수라는 직책을 중요시하는 최 교수는 75학번 인하대 공과대학 700명 동기 중 유일한 여성이다.

“제가 1학년이었을 때, 공대 여학생은 건축과 3학년 1명, 기획과 2학년 1명뿐이었어요. 하지만 여성이기에 특별히 힘든 점은 화장실이 한 개밖에 없다는 것 뿐이었죠.”

대학 시절, 그는 여성이니까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남학생들이 축구를 하면 같이 뛰놀며 대학 생활을 보냈다.
그런 최 교수에게 대학 공부는 쉽지 않았다. 그는 물리화학 수업시간에 보는 첫 시험에서 0점을 받기도 했다. 암기 위주의 공부법이 문제였다.

“이해가 중요한데 그냥 외우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죠. 나중에는 동기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공부했어요.”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하지 못한 최 교수는 부천공업고등학교에서 3년, 강화 화도중학교에서 1년간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과외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과외금지령으로 과외를 하지 못하게 되자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200달러만 갖고 미국 LA로 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용기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죠. ”
최 교수는 미국 유학 생활을 회상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미국에서 처음 번 돈으로 산 닭고기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수퍼마켓에서 제일 싼 닭고기를 샀는데, 막상 먹으려고 보니 뼈밖에 없었어요. 그 닭고기를 6개월간 3번 이사하면서도 버리지 못했어요. 미국에서 힘들게 번 돈으로 산 첫 음식이라고 생각하니…”
말을 잇지 못할 만큼 경제적으로 힘든데다 대학원 공부도 만만치 않았다.

“주말에는 수퍼마켓에서 일도 하느라 빠른 수업 진도를 어떻게 따라갈까 막막했죠. 1년 정도 지나니 영어도 들리면서 공부가 점점 재밌어졌어요.”

최 교수는 결국 해냈다. 대학원을 무사히 졸업하고, 한국여성공학기술인협회를 최초로 설립한 그는 자신과 같이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지갑을 열기도 했다. 그는 2005년 인하대에 5천만원, 2007년 모교인 인천 인일여고에 장학금 3천만원을 기부했다.

장학금액은 제35회 과학의 날 과학기술포장, 제2회 아모레퍼시픽 여성과학자상 대상 등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과 그의 결혼 축의금을 모아 마련했다.

“연구 아이디어는 저에게서 나왔어도, 일은 학생들이 했잖아요. 이 상금을 함께 고생한 학생들이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기부를 결정했어요.”

기부는 상대적으로 더 가지고, 더 배운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최 교수는 앞으로도 선행을 이어갈 예정이다.

“저도 미국에서 장학금을 받아봐서 수혜자에게 그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아요. 돈이 많아야지 기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맞게 기부하면 되요.”
연구, 기부, 교육부터 이사장으로서의 새로운 도전까지, 최 교수의 인생에 추가될 타이틀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정이슬 기자 iseul1114@ewhain.net
사진: 배유수 기자 baeyoosu@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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