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대학생이‘배움이 사라진 대학을 거부한다’는 대자보를 붙이고 자퇴했다.
소위‘고대 자퇴녀’로 알려진 김예슬 씨는 금방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올랐다.

이 대자보에서 김 씨는 경쟁을 부추기는 현실을 비판하고, 학생을‘쓸모 있는 상품’으로 만드는 것에 혈안이 된 대학을‘대기업의 하청업체’에 비유하였다.

일이 있은 직후 각종 포털 사이트와 커뮤니티는, 김씨의 행동에 대한 김씨의 말이 옳다 그르다의 찬반의견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사실은 정치적인‘쇼’라는 일종의 음모론까지 등장하며 들끓었다.
‘고대 자퇴녀’가 그토록 화제가 된 것은 이미 교육기관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권력이 되어버린 대학을 개인이 그 자신의 신념에 따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명문대 졸업장은 행복을 약속하는 가장 든든한 보험이었다.
그 오래되고 거대한 환상이 기우뚱한 순간은 당연히,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스무 살을 넘어 사회적, 법적인 성인으로 인정받으면 이전의 규율과 통제가 일시에 풀린다.

더 이상 머리 길이나 옷, 특정 장소의 출입에 제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이른바 ‘완전한 자유 의지’를 지닌 개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오늘 하루만 해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것을 원하고 또 주장했다.

요즘 자신의 의견 하나도 제대로 제시할 줄 모르는 사람은‘루저’다(그 유명한).
그 와중에 사회는 똑똑하고 당찬 젊은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의도하고 원하는 것을 쟁취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열심히 부추긴다.

그렇게 뜻대로 살고 있다면 행복하고 충만해야 하는데, 어째 20대의 초상화는 불안하기만 하다. 
푸코에 따르면 현대권력은‘삶에 대한 통제’를 바탕으로 존재하며 지배한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우리의 일상 어디에서나 권력의 작용을 발견할 수 있다.
법조항에서부터, 일상의 밑바닥을 도저하게 흐르는 규율과 인식, 관습까지 모두 그 안에 속한 우리를 형식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길들이는 데 기여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권력은 통제와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외부의‘힘’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손으로 이화여대와 대학생의 신분을 선택했다.

꿈을 위하여! 그러나 그것이 ‘만들어진 욕망’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
누가 어떤 길을 가든지 결국에는 최고의 가치가 ‘대학으로 가서 배움을 얻는 것’으로 수렴되는 사회와, 대학교 졸업장이 주는 무수한 혜택 같은 것들이 내면화되어 있지 않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까.

총대 메고 먼저 고백하자면 내 대답은 ‘아니요’다.

실제로 수많은 이들이 꿈과 학문 사이의 괴리감에 절망하지만, 쉽게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대학을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아나서는 것은 우리의‘자유’지만, 대학에 다니면서 거기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방식을 택하는‘자유’를 만들어내는 권력의 힘이 무척 센 까닭이다. 

치밀한 장치와 관계를 구축하여 작동하는 권력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그 안에서 사육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논란은 내려놓고서라도 대학, 나아가 권력과의 관계에서 놓이는 압도적인 약자의 위치를 거부한 김 씨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김 씨와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불편하거나, 반응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와는 별도로 현재 자신이 어디에 어떤 포즈로 서 있는지 되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가능성은 현재의 상태를 기민하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런 식의 논의는 어디로든,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다.

다이어트, 취업, 결혼은 물론 좁게는 채플에 늦지 않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던 오늘 아침까지도 말이다.

뛰겠다고 다짐한 것은‘나’지만, 무엇이 나를 그토록 달리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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