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끝내 눈까지 동반하고 3월의 이화동산을 뒤덮었다. 김소월과 박목월의시어로 봄바람’,‘진달래’,‘네잎 클로버’, 그리고‘4월의 노래’와 같은 따스한 봄의 노래들을 작곡한 이화인 김순애선생님(1920-2006)은‘꽃샘바람’이라는 노래도 만들었다.

변덕스러운 봄은 반세기 전이나 오늘이나 한결 같은 모양이다. 그는 한때“단 한 사람의 우리나라 여류작곡가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150여 소품과… <2 악장의 교향곡>을 작곡해 낸 유니크 한 존재”(1964년 1월 1일,한국일보 기사)였다.

새해특집으로 여성 작곡가 김순애를 조망한 이 기사는 당시 모든 이들의 막연한 열망인 서양과 현대를 표방하며 사회적 지위와 부의 상징인 피아노를 마주한 그의 사진과 함께“우주가 감추어둔 선율을 찾아”새해에는 새로운 교향곡 작곡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설정으로 되어 있었다.

당대를 대표하던 여류 시인 김남조와 함께 만든 대표적인 가곡‘그대 있음에’의 자필 악보까지 소개한 이 기사는 당시 김순애의 사회적지위는 물론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70~80년대 이른바‘한강의 기적’에 의해 경제적으로 부강해진 나라에서 서구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유학의 꿈을 꾸기 시작한 나를 포함한 젊은 음악도들에게 김순애는 가장 닮고 싶은 음악인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 기억에 그는 항상‘한국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거의 매일 다양한 매체를 통해 뉴스거리가 되었다.

원래 문학도가 꿈이었던 그는 음악 작품뿐 아니라 타고난 글 솜씨와 놀라운 예지로 당시 한국 지성인들의 숙제인‘정체성 있는 한국 음악문화 만들기’와‘우리 음악의 현대화’에 관해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글들을 쏟아 놓으며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의 글쓰기는 이화학보사에서 4292년(1959년) 6월 15일에 출간한‘우리 음악을 토대로’라는 제목의 글로 시작된 것 같다.

그 당시 그는 이미 동서 교류를 통한 우리 음악의 세계화를 논하고 있다.

“우리만이 가진 전통음악을 버리고 서양음악을 숭상하는 것이 어리석은 노릇”임을 반성하고“오늘의 세계가 아주 가까운 이웃”이기에“우리 음악이 문화적 경계를 넘어 감동을 주는 (세계인을 위한) 음악”으로 자리잡기를 촉구하는 글을 이미 반세기 전에 쓴 것이다.

주요 신문에 자신의 칼럼을 갖고 있을 정도의 설득력 있는 글 솜씨와 더불어, 한국인의 얼이 담긴 시어를 서양의 복잡한 음악언어와 대규모의 장르보다는 소박하고 단순한 가곡으로 표현하여 그는 대중들에게 가장 환영 받는 여성 예술인이 되었다.

음악사 저서들은 1970년대 서구에서 여성운동이 일어난 이후부터 여성 작곡가들을 포함하긴 했지만 남성 작곡가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이화에 돌아와 음악사를 가르치면서 나는 학생들로 하여금 여성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며 직접적인 경험을 갖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일은 한때 젊은 여성 음악도들의 절대적인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부모들에게는 딸들의 성공적인 미래상이었던 김순애를 아는 학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이처럼 빨리 잊혀지고 말았을까?

그에 관한 민족지학 연구의 부재와 성숙기인 1970년대 이후의 작품들이 전혀 출판되지 않은 가운데 김순애는‘현대적인’ 작품을 쓰지 않은“구닥다리”작곡가로 폄하되고 있다. 우리의 의식 변화를 촉구하는 그의 글들도 읽고 나면 버려지는 신문처럼 그렇게 잊혀져 갔다.

대부분의 전문 음악인이 여성이면서도 철저하게 연주 중심인 우리 음악계에서는 음악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음악학자의 부족으로 그 동안 김순애와 같이 우리 음악 변화의 중추적 역할을 한 이들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지고 있다.

우리 이화 음악학이 2006년부터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문학 비평, 문화연구 등 다양한 학문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여성 작곡가들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아무리 기후가 변했더라도 꽃샘바람만 불면 김순애의 봄노래들은 어김없이 우리귓전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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