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건축가 편견, 신장염에도 굴하지 않고 쉼없이 건물을 짓다

 

“60년간 건축가가 제 천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건축가로 살고 싶어요.”

(주)간삼파트너스 상임고문 지순(서울대 건축학과·58년졸)씨는 건축과 사랑에 빠진 제1호 여성 건축가다. 한국은행 본점, 르호봇(Rehoboth Business incubator) 선릉 포스코 센터, 서울역 연세재단 세브란스 빌딩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최근 한국건축가협회 명예이사, 실내장식학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를 11일(목) 오전10시 종로구 신당동 (주)간삼파트너스 사옥에서 만났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지씨는 수학 과목과 미술 과목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에게 오빠가 준 잡지는 건축과의 운명적인 첫만남이 됐다. 지씨는 잡지에서 세계 여성 건축가에 대한 기사를 읽고, 여성 건축가의 존재에 대해 처음 알았다.

“그때는 건축이 무엇인지, 건축가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몰랐지만 마음이 끌려 건축학과를 선택했어요.”

건축과로 진로를 정한 그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건축학과 진학에 성공했다. 건축학과로 진학하기까지는 오빠의 도움이 컸다.“아버지께서 ‘목수되는 학과, 집짓는 학과를 왜 가냐’고 반대하셨어요.

당시 공부 잘하는 여성은 의대나 약대를 가는 것이 보통이라, 부모님께서는 의사나 약사가 되는 것을 원하셨죠. 오빠가 부모님을 설득해주지 않았다면 건축학과에 진학하지 못했을 거예요.”

1954년 입학 당시 건축과 학생 40명 중 여학생은 단 두 명. 밤샘 작업이 많아 힘들었지만 지씨는 견뎌냈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라 당시 종로구 연건동에 있던 서울대 건축학과 시설은 도판 뿐이었어요. 시설은 좋지 않았지만 건축가에게는 도판과 연필, 도구만 있으면 되죠.”

대학 졸업 후 같은 학과 선배인 원정수 (주)간삼파트너스 상임고문과 결혼한 그는 1966년 여성 최초로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건축사 자격증을 따려면 7년간 실무에서 근무한 경력이 필요했어요. 결혼 후 출산과 건축 일을 병행했죠. 임신을 했을 때도 부른 배를 부여잡고 설계도를 그렸어요.

” 당시 몇몇 일간지에서‘자녀 셋을 둔 주부가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제목으로 기사가 올라오기도 했다.

여성1호 건축사라는 타이틀 뒤에는 사회의 편견도 있었다.“당시 건설 현장에 여자가 들어오면 좋지 않다는 풍조가 있어서 설계자인 제가 현장을 들어가지 못했던 적이 많았어요.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도면을 가져다주거나, 분필로 콘크리트 면에 도면을 그려놓고 오기도 했죠.”

수많은 건물을 지으며 40년 간 일해 왔던 그에게 12년 전 시련이 다가왔다. 신장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는 그럼에도 건축에 대한 열정을 꺾지 않았다. 항암치료 중에도 사무소에서 나와 일을 했다.“몸은 아팠지만 쉬고 싶단 생각보다 더 악착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들도 제가 일하겠다는 의지를 꺾지는 못했죠.”

그는 라마다 프라자 제주호텔 등 대형 건물을 설계했지만 건축사 초기 시절에 지었던 주택, 공장들을 가장 기억에 남는 설계로 꼽는다.“젊은 시절 서투르지만 도전적으로 설계했던 건축물들이 더 기억에 남아요. 어떻게 하면 좁은 대지에 기능적이고 좋은 건축물을 지을 수 있을지 고민했던 나날이 소중하죠.”

수십 년 동안 건축만 바라보며 달려온 지 56년이 지난 지금, 그는 올해로 76세이지만 아직도 상임고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씨는 10월4일(월) 개최되는 세계여성건축가 총회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 여성 건축가가 좀 더 편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그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정이슬 기자 iseul1114@ewhain.net
사진제공: 지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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