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위협, 유학행 결정, 연구관으로 회기 등 자신의 길 걸어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식량산업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화장기 없는 맨 얼굴과 짧은 머리로 수더분한 분위기를 지닌 전혜경 원장은 편안하지만 힘이 담긴 음성으로 힘주어 말했다. 농촌진흥청(농진청) 개청 이래, 최초의 여성 연구정책국장에 이어, 최초의 여성 국립식량과학원(식량원) 기관장이 된 전혜경 원장(식품영양학 석사)을 9일(화) 수원시 식량원 원장실에서 만났다.

“오전 8시에 출근하는데도 오후 10시 전에 집에 들어가 본 적이 거의 없어요. 그래도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대내외 각 종 회의, 사무실 업무, 자료검토, 전국 각지로의 출장 등 매일 최소 13시간의 업무량을 소화하는 전 원장에게는 휴일도 없다. 전북 익산, 경남 밀양, 강원도 평창, 전남 무안 등지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벼맥류부, 기능성작물부, 고령지농업연구센터, 바이오에너지작물센터 등을 둘러봐야 한다. 식량원에서 개발한 작물로 실제 농사 짓는 현장을 방문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전 원장은 과학교육을 전공하던 학부생 시절, 자신이 공직자가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다. 화학을 공부하려했던 전 원장을 만류한 것은 아버지였다.

“연구실에 파묻히는 삶이 아닌, 사회에도 환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제 인생을 바꿔놓았죠.”

1983년 전 원장이 농촌영양개선연수원(영양개선연수원) 연구조사과에 지도사로 특별 채용됐던 당시, 정부 기관에는 농업 관련 식품 전공자가 희소했고 국민들의 식품영양에 대한 인지도도 낮았다. 그는 그럼에도 ‘농사를 짓는 이유는 먹을거리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새기며, 식품 연구의 대중화를 위해 농진청에 남았다.

1993년 10월 지도관으로 승진한 지 채 1년도 안 돼, 전 원장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3년 후 돌아왔을 때 제 자리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그 때 전 3년 후의 자리에 집착하지 않고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믿어요.”

1994년부터 3년간 미국에서의 연구를 마치고 귀국한 전 원장은 영양개선연수원 기획실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실험실 연구원에서 연구행정직으로 그의 정체성이 달라진 순간이었다. 당시 전 원장은 농진청 농촌생활연구소의 폐지 논란이 있을 때, 구조조정의 칼날을 막아내느라 애썼다.“제 분야를 지키려고 필사적이었던 그 때부터 끈질긴 인내와 신념을 지니게 된 것 같아요.”

기획실장을 거쳐 농촌생활연구소 가정경영과장, 농산물가공이용과장을 역임한 전 원장은 2005년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을 맞았다. 돌연 보직을 내려놓고 연구관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는 일·숙직을 포함하여 다른 연구관들과 똑같이 근무하면서 식품산업육성법 등을 제정하는데도 적극 관여했다.

농림부가 농림수산식품부로 개편됐고, 농진청 국립농업과학원에 농식품자원부도 개설됐다. 기관명에 ‘식품’이 포함됐다는 것은 그동안 외면당했던 식품 연구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힘쓴 전 원장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남들은 소장 진급을 앞두고 어리석었다고 하지만, 저는 연구관으로 돌아갔던 그 시기를 후회하지 않아요. 자리보다는 소신이 중요한 거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고 나아갔던 전혜경 원장. 연구직에서부터 원장의 자리를 넘나들며 그는 자신이 꿈꾼 ‘농식품의 부가가치 향상과 후배 연구진들의 연구 환경 안정화’를 실현해냈다.

“남들이 가지 않은 뒤안길에 꽃길이 있습니다. 여럿이 가는 길을 편안하게 따라가는 대신, 스스로 개척하는 길을 걸어 나가길 바랍니다”


               
최슬기 기자 redwin2026@ewhain.net
사진제공: 전혜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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