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동안 한적하던 학교는 개강한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캠퍼스의 북적이는 학생들을 품 안 가득 끌어안고 있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러블리 본즈’에서 주인공 수지 샐몬은 죽은 뒤 저승과 이승의 경계, 지평선 같은 세계를 떠돌면서 수지는 항상 14살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14살 수지는 점차 커져가는 현실과 저승의 간극을 느끼게 된다.
수지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고, 가족들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가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갓 입학했을 때를 생각했다.
마치 수지가 점점 변해가는 세상을 느끼면서 겪는 갈등처럼 종종 어느 한 지점에 머무르는 것 같은데 세상은 빠르게 변해간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물리학자는 카지노에서 돈을 잃어도 슬퍼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도박에서 결과는 돈을 따는 것과 돈을 따지 못하는 것(잃거나 본전치기를 포함해서),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떻게 도박을 하건 결과는 딱 두 가지뿐이다.

그러므로 당장 현실에서 돈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다른 경우와 다른 세계의 자신은 돈을 땄을 것이라는 가정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 다니는 기간은 4년 내외지만 그 시간을 알차게 채우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이제 갓 입학한 10학번, 대학생활에 익숙해진 09학번 이상의 이화인 모두 갈림길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학교 안에서 또 밖에서 여러 종류의 갈림길을 만나고 동시에 몇 가지 선택들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학과 공부에 열중하는 동시에 외국어 학원을 다니며 자격증을 딴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버려진 다른 선택들은 마냥 버려진 채 있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평행 세계에서 조금 다른 길을 걷는 나 자신도 있지 않을까?

대학생활의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다른 세계에 있을 자신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종종 상상을 해 보곤 한다.

힘든 일이 있으면 종종 ‘폭풍의 언덕’ 속에나 나올 법한 황야를 꿈꾸곤 했었다.
소설의 실제 배경은 영국의 요크셔지만 오히려 스코틀랜드 북쪽의 황갈색 초원이 더 걸맞는 것 같다.
그곳에선 잊을 만하면 작은 호수들이 보이고 덤불지어 핀 보랏빛 히스꽃이 검회색 하늘 밑에 피어 있다.
서울 토박이로 명절에도 흔히 말하는 시골집, 전형적인‘고향’에 가본 적이 없는 내게는 한번밖에 가보지 않은 그곳이 오히려 고향의 원형에 가까웠다.

어쩌면 어느 평행 세계에선 또 다른 스무 살의 내가 차를 타고 황야의 1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행우주론’에 따르면 우리 우주는 전체의 일부분이며 세상에는 수많은 우주가 존재한다.
과학자들의 확률 계산에 따르면 지구를 중심으로 반지름 약 3조 5천억 광년인 공간 안에는 나와 같은 존재가 하나쯤은 살아간다고 한다.

1백40억년이라는 우주의 역사, 3조5천억광년의 수치는 너무 거대해서 오히려 꿈처럼 막연하다.

그러나 이조차 결코 무한은 아니므로 무한한 우주 속에는 더 많은 수의‘나’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
같은 원소 결합으로 구성된 쌍둥이같은 외모에, 무한분의 1에 가까운 확률로 존재하는 똑같은 우주와 똑같은 진화과정을 거친 생명체로서 어쩌면 같은 취미와 친구들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12년의 정규교육과정을 거쳐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이화에 오기 위해서 수능을 1년 더 공부하는 선택을 했을지, 아니면 다른 대학에 갔을지.

또 국어국문학과라는 전공을 선택했을지 다른 전공을 더 좋아했을지…….

상상 속에서 이미 평행 세계는 무한히 펼쳐져 있다.

그리고 상상을 하다 보면 그 가운데서 현재의 또 다른 선택에 도움이 되는 단서들을 집어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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