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학보 창간 56주년 기념

 

<편집자주>
만평은 신문 지면에 그려진 詩다. 만평은 당대의 사회를 풍자, 비판하면서 함축적, 은유적인‘역사 기록서’의 역할을 한다. 본지는 창간 56주년을 맞아 이대학보 만평의 변화상을 살펴보고 당시의 학교 풍경에 비추어 봤다.

이대학보 만평은 시대별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왔다. 만평 속 이화인들은 언제나 그래왔듯 수강 신청 대란에 휩쓸리기도 하고, 간혹 거리로 나가 깃발을 흔들기도 한다. 그 때 그 시절, 이대학보의 만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난 신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봤다.

 

△대학생활 다룬 첫 만평‘이원만평’

이대학보 만평은 창간 2년만인 1956년 10월23일자 학보에 ‘이원만평’ 이란 제목으로 처음 등장했다. 이원만평 제1호 「머리도 가지가지! 차림도 가지가지 그러나 마음만은 하나!?」는 일곱 명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서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이 만평에서 서양식 차림새를 한 신여성을 엿볼 수 있다.

비정기적으로 실린 한 컷짜리 ‘이원만평’ 은 사회 풍자나 학내 사안에 대한 비판보다는 학생들의 일상 생활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뤘다. 당시의 이대학보는 주로 학교 홍보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교수편집 위원제도’가 운영돼 교수들이 모든 기사를 기획, 총괄했다.

학내 사안을 주제로 한 만평은 1959년에 교수편집위원제도가 폐지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 4월1일 보도된 만평은 수강신청의 어려움을 풍자했다.

정치적 사안을 담은 최초의 만평은 같은 해 5월9일 실린 만평으로 4·19혁명을 주제로 다루기도 했다. 그러나 15년간 비정기적으로 연재되던 이원만평은 1969년 9월29일자 신문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화만평’을 통해 사회·정치적 비판

이대학보가 기관지적 성격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확립해나가면서 1980년 3월10일자 신문에 만평이 다시 등장했다. ‘이화만평’ 이라는 새 이름으로 등장한 만평은 교내·외 주요 사안에 대한 비판을 담아냈다.

1983년 9월5일자 신문에는 IPU총회, 86아시안게임, 교황 방문 등 ‘국가 행사’ 를 학생을 가두는‘철장’으로 표현한「여기, 웬 기도원이니?」가 게재됐다.

1983년 3월7일자 신문에는 등록금에 비해 적은 장학금에 대한 비판을 담은 만평을 실리기도 했다. 1980년 5월12일자 신문의 이화만평「비상계염 해제하라!」는 사전 검열로 인해 백지로 발행됐다.

 

△네컷 만화와 독자만평의 등장

1986년 10월6일자 신문에는 완결된 형식을 갖춘 4컷 만화‘따꼼이’가 실렸다. 따꼼이는 주로 광주민주항쟁 청문회와 올림픽 유치반대 등 사회·정치적 사안을 지적했다.


이대학보는 1988년 11월21일자 만평 따꼼이를 통해 제2캠퍼스 추진에 관한 내용 공개를 요구했고, 제2캠퍼스 설립 추진 계획을 철회하는 성과를 얻었다.


이대학보 네 컷 만화는 시원이, 알찌니, 참솔이, 화끈이 등 기발한 이름의 캐릭터 만화로 이어지다 2007년5월21일자 ‘이몽이의 세상읽기’ 를 끝으로 4컷 만화의 막을 내렸다.


1992년 7월20일자 지면에는 만화가 천계영(법학·93년졸)씨의 ‘독자만평’ 이 실리기도 했다. 당시 법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만화가 천씨는 노태우 정부를 ‘노태지와아이들’ 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만평은 지방자치제 공방으로 민생을 외면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다시 학내 사안 비판에 집중하다

이화만평은 2007년 이후로 낮은 대동제 참여율, 학내 도난 사건 등 학내사안에 초점을 맞춘다. 2008년 10월6일자 신문에는 자치단위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변날)의 무지개 걸게 도난 사건에 대한 만평을 보도했다.


이대학보 56년의 역사 중 54년을 함께 해 온 만평은 한 컷부터 네 컷에 이르기까지 이화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2010년 1학기는 기존의‘만평’과 더불어 새로운 코너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것을 약속한다.


사각 컷 속에 그려질 이화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김아영 기자 momonay@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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