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구명 운동, 가족법 개정, 여성특별위원회… 고(故) 김대중 대통령과 이화 그 특별한 인연

민주화 투사, 사형수, 대통령, 노벨상 수상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 이름들이다. 김 전 대통령은 사는 동안 숱한 탄압을 받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그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대권을 잡았다.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도 받았다.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25일(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100일을 계기로 그와 인연을 맺었던 이화, 그리고 이화인을 소개한다.

△서울의 봄과 이화여대
1980년 봄을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시민들은 민주화의 실현을 믿었다. 1980년 3월부터 대학을 중심으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의 희망이었다.

1980년 5월16일, 55개 대학의 학생회장단 100여명이 본교 연구관 경영교실에 모였다. 이들은 어떤 식으로 운동을 계속할지 의논했다. 열띤 토론은 다음날까지 계속됐다. 재야 민주화 운동가였던 김 전 대통령은 이들의 안전을 걱정했다. 그는 그의 동지들을 시켜 학생들에게 과격한 행동은 자제하자고 설득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일단 학내에 서만 진행됐다.

5월17일 저녁, 익명의 기자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전화해 “김대중씨와 이화여대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발 늦었다. 보안사 군인들이 학교를 덮쳤고,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은 보안사로 잡혀갔다. 피신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체포됐다. 다음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전두환 정권이 탄압하면서 서울의 봄은 끝났다.

△인동초와 함께한 이화인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고문과 재판에 시달렸다. 장남 홍일씨도 체포되고 나머지 가족들은 가택연금 당했다. 생활이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본교 출신 미래포럼 박영숙(영문·55졸) 이사장이 큰 힘이 됐다. 1980년 9월, 감옥으로 면회 간 홍일씨의 아내에게 박 이사장은 교도관 몰래 봉투를 건넸다. 이것은 이희호 여사의 이화여전 동창인 이영복씨가 모은 성금이었다.

박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누명을 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도 구명 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1987년에 박 이사장은 당 부총재가, 다음해에는 여성 최초로 비례대표 1번을 받아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이태영(가사·36졸) 변호사는 1970년 대선 당시 본교 법정대학 학장이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학장직을 사임했다. 이 변호사는 1976년 3.1 구국선언의 숨은 주도자이기도 하다. 김 전 대통령이 쓴 민주화를 호소하는 구국선언문을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몰래 전달하기도 했다.

선언 후 김 전 대통령은 구속됐고, 이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을 잃었다. 그러나 그를 위한 변호를 멈추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의 재판 내내 침묵 시위를 위해 이희호 여사와 십자가 모양의 검정 테이프를 입에 붙였다. 김 전 대통령의 망명을 도운 것도 이 변호사다. 1982년 9월23일. 이희호 여사, 이태영 변호사, 본교 소니아 R. 스트론(Sonnia R. Strawn) 교수(영어영문학과)는 당시 리처드 워커(Richard Walker) 주한 미국대사에게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을 부탁했다. 12월16일 김 전 대통령은 석방됐고, 곧 미국으로 망명했다.

△여성운동가 김대중과 이화인들
13대 국회에서 제1야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은 가족법 개정을 시도했다. 평화민주당 박영숙 부총재, 가정법률상담소 소장 이태영 변호사, 이 변호사의 아들 정대철 국회의원이 지원군이 됐다. 그러나 여성 정책은 법안 상정도 힘들었다. 김 전 대통령은 여당 대표와 원내 총무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법안 통과를 호소했다. 1989년 12월19일, 가족법은 통과됐다. 가족법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부부 중심의 민주적 가족제도를 지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8년 대통령 당선 직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설치됐고, 본교 윤후정 이사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그 결과 2001년 여성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초대 여성부 장관은 한명숙(불문과·67년졸) 전 국무총리다. 여성운동가이며, 본교에서 여성학을 강의하기도 했던 한 전 국무총리는 모성 보호 관련 3법을 제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진보적인 여성관을 가지게 된 데는 이희호 여사의 영향이 컸다. 이화여전, 서울사범대를 거쳐 미국 유학까지 했던 이희호 여사는 열성적인 여성운동가였다. 그는 귀국 후 본교 사회사업학과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여성 문제에 관해 김 전 대통령에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중국 인민일보사 잡지 ‘스다이차오(時代朝)’는 이희호 여사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이희호 여사는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노력을 대통령과 함께했다. 그만큼 노벨 평화상 절반은 부인의 몫이다.”

△끝나지 않은 인연
2009년 8월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86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국립 현충원에 안장된 김 전 대통령 묘지 20m 옆에는 이태영 변호사의 묘소가 있다.
육신은 떠났지만 이화와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미래사회포럼 박영숙 이사장은 장례식 추도사를 맡았고, 한명숙 총리는 장의위원이었다. 

조은정 객원기자 eunshiri0820@ewhain.net
사진 출처: 「동행」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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