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수업 발표를 위해 정소현의 ‘돌아오다’라는 소설을 읽었다. 이 작품에는 귀신이 등장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자신 혹은 타자와의 ‘관계맺음’에서 심각한 문제를 보였다.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있지만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스스로 고립시킨다.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나는 과연 인간인가?’ 인간답게 사는 기준을 자아 그리고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맺음에 둔다면 나는 인간이 아닌 귀신이다. 나는 ‘돌아오다’의 귀신처럼 타인과 단절하는 ‘차가운 마음’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단절 상태.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2008년 6월, 대학생 2,514명을 대상으로 한 ‘대학생 친구 친밀도’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친구는 친해질 수 없다는 말이 나온 이유’로 학업 및 취업에 의한 경쟁관계(45.01%), 필요에 의해서 만난사이(33.95%), 같이 수업만 듣는 사이(28.38%) 등이 꼽혔다.

이 통계결과에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대학생이 서로 감정적인 교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너지의 대부분을 제한된 시간동안 자기 경쟁력을 기르는 데 소모해야 하는 대학생들은 타인과의 감정적인 교류를 우선순위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개인이 소통의 필요성을 느낀다 해도 자발적인 단절 상태를 지향하는, 또 지향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같은 보고서에서 ‘대학생이 나홀로족으로 생활하는 이유’로는 내 스케줄에 따라 움직일 수 있어서(38.66%),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서(19.14%), 남들과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서(17.52%), 혼자만의 시간을 통한 자기만족 (14.6%) 등이 꼽혔다. 이는 개인이 타인과의 감정적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 이미 익숙해져 있음을 보여준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주변에 벽을 만들고, 이 벽이 높아질수록 관계 맺기는 더욱 어렵고 피곤한 일이 되어 혼자 있는 것이 편해지는 패턴이 반복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소설 ‘좀머 씨 이야기’(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그는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다 끝내 자살을 택한다. 그가 도망치려 하는 것을 타인, 나아가 세상과의 관계맺음 자체로 보면 어떨까.

실제로 이 소설을 쓴 쥐스킨트는 은둔 작가로 유명하다. 쥐스킨트는 자기 작품과 관련된 부수적인 일은 모두 형에게 위탁하고 오두막집에 틀어박혀 살면서 자신의 신상에 대해 발설한 자라면 친구건 부모이건 상관없이 절연해버린다고 한다. 제한된 시간, 치열해지는 경쟁 환경 속에서 관계의 문제는 갈수록 풀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아무리 좀머 씨처럼 도망쳐 봤자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어쩌면 죽음뿐이다. 아니, 죽는다 해도 관계는 남는다. 나라는 실체만 없어질 뿐, 관계는 다른 양상으로 영원히 반복된다.

자신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일 것이다. 그 문제의 시발점은 개인과 사회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어느 한 지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계의 불안한 형상은 그 지점에서부터 삶의 순간순간마다 계속 돌아온다.

소설 ‘돌아오다’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는 언제든 다시 돌아오는 관계의 양상을 기다리고 마주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귀신의 삶보다는 인간의 삶, 관계 속에서 살아있는 삶을 택하라는 것이었다.
 너무 쉽게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관계맺음 자체를 수용하며 사는 것. 그 과정은 어렵고 상처받음을 수반하지만 소설 속 ‘나’처럼 ‘차가운 마음’으로 자신을 무장하기보다는 ‘헤픈 마음’을 긍정하면서 사는 쪽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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