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문화예술을 사랑해요. 문화예술에 대한 열정이 화랑 경영의 원동력이 됐죠.”

‘선 갤러리’ 김창실(약학·57년졸) 대표는 인사동의 터줏대감이다. 그는 1977년 화랑 사업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약400회의 전시회를 열어왔다. 김 대표는 이러한 문화 발전 공헌으로, 10월17일(토) 화랑 경영인 최초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32년 동안 꾸준히 화랑을 이끌어 온 김 대표를 12일(목) 그의 화랑에서 만났다.

“대학 시절, 나는 늘 「좁은 문」, 「부활」 등 세계문학을 한 팔에 끼고 다녔어요.” 그는 약학도였지만 문화를 사랑하는 여대생이었다. 국어국문학과 수업에 교수 몰래 들어가 강의를 듣기도 하고 미술 대회인 국전도 빠뜨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몇 십년 전, 국전에서 산 목불 장운상씨의 그림엽서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어요.”

대학졸업 후 결혼한 그는 그림 수집에 빠졌다. 당시 여인들이 자개농같은 가구를 샀던 것과는 사뭇 다른 취향이었다. 미술, 음악, 문학을 어릴 적부터 가깝게 접한 덕분이었다. “부모님이 예술을 즐기시는 분이셨어요. 방에는 클래식이 끊이지 않았고 집안 곳곳에 미술품이 걸려있었죠.” 결혼 후에도 문화에 대한 욕구를 간직하고 있던 그는 약국 경영으로 모은 돈으로 본격적인 그림 수집을 시작했다. “주말마다 남편과 함께 인사동을 거닐며 그림을 모으곤 했죠.” 그 때 구입한 김 대표의 그림은 200여점이다.

김 대표가 본격적으로 화랑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건물에 세를 냈던 고미술품 화랑 ‘고옥당’ 주인의 권유였다. “임대인이 고옥당 운영을 그만 두면서 제게 화랑을 운영 해보라고 말했어요.” 자녀들이 수험생이었던 김씨는 화랑을 차리기가 망설여졌지만 큰아들이 화랑 시작을 적극 권유했다. “큰아들이 제게 어머니가 그토록 좋아하는 문화 사업을 하라고 격려해줬어요. 그 덕에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지요.”

그는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로 1977년 인사동에 선화랑을 개관했고, 2003년 증축공사를 해 지금의 ‘선화랑 선 아트센터로’ 발돋움했다. 초기에는 결혼하면서 사둔 그림들을 걸어 놓았다. “평소에 사둔 그림들이 사람들에게 반응이 좋았어요. 입소문이 퍼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지요.”

이 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예술가의 작품 활동 장려를 위한 ‘선 미술상’ 제정, 인사동 거리의 화랑 분위기 회복을 위한 ‘인사 미술제’ 개최 등을 실현시켰다. 1979년 한국 최초 미술 잡지인 ‘선미술’도 발간했다. 이 잡지는 광고 하나 없는 순수한 미술 저널이다. “예전에는 화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 잡지로 대중에게 미술을 널리 알려주고 싶었죠.”

김 대표의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외국 작가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탈리아 거장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의 작품을 한국에 전시했다. “제98회 베니스비엔날레 관람차 베니스를 찾았을 때 마리니의 기마상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그 전율을 한국에도 전하고 싶었지요.” 마리니에 대한 열망은 그를 이탈리아로 이끌었고 끈질긴 구애 끝에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의 노력으로 2007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리노 마리니-기적을 기다리며’전을 한국인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지긋한 나이에도 외국의 예술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 관계자들을 만나러 발로 뛰는 이유는 문화가 국가경쟁력 재고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뮤지컬 명성황후, 난타는 세계에 진출해 한국을 널리 알리고 큰 경제 수익을 남겼지요. 우리나라의 뛰어난 작가들이 세계에서 유명해지면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 국가 경쟁력도 높아집니다.”

김 대표의 꿈은 소박하다. 그의 꿈은 초심을 지키며 화랑을 계속 운영하는 것이다. “내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화랑 주인으로서 책임을 다 하고 싶습니다.”  

 전하경 기자 jhk0712@ewhain.net
 사진: 안은나 기자 insatiable@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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