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먼저 어떤 악기를 하느냐고 묻는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으레 “아 그러면 성악가시군요”라고 단정 짓는다. 대학에 있는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은 그래도 “아 작곡을 하시는구나” 하며 한 단계 더 나아가기도 한다. 그래도 작곡까지는 독립된 학과로서 음악대학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그저 아름다운 소리의 현상일 뿐인가? 지난 1세기간 서양의 음악을 그대로 받아들여 ‘빨리’‘세계적인’ 연주자만을 배출하려고 노력한 우리 음악계가 그것이 전부인양 우리를 부추긴 것은 아닐까? 예술음악의 본 고장인 서구에서는 음악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음악학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들리는 음악’ 뒤에서 꾸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이론과 역사를 만들고 있다. 이른바 ‘들리지 않는 음악’을 업으로 삼는 음악학자들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날 음악의 아버지 또는 음악의 뉴턴이라 불리는 바흐도, 신동 모차르트도, 그리고 악성 베토벤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학자들이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한 곡을 완성하기까지 수많은 스케치를 만들어가며 엄청난 수정의 과정을 거쳤다는 베토벤의 필사본들을 도서관 창고나 먼지 덥힌 헌 책방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근거로 최종 악보를 만들어 연주를 가능하게 하며, 베토벤과는 정반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악상을 아무런 스케치 없이 단번에 써내려 갔다는 모차르트의 작곡 방식과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했을 것 같은 그가 실은 하인처럼 살았다는 사실들을 기록자료에서 찾아내어 음악의 사회, 정치, 경제, 철학 등과의 관계를 밝혀내고, 그 자신이 작곡가이었지만 비평가이기도 했던 슈만이 그가 발행한 음악잡지에서 브람스를 “미래를 열 천재 작곡가”라고 칭송하며 유럽 음악계에 데뷔시킨 일을 통해 당시 비평의 역할 및 시대적 사회상을 밝히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미 바로크시대에도 바브라 스트로찌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한 여성작곡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역사에서 왜 여성 음악인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억제된 교육 환경과 남성 중심의 출판 문화와 같은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조명하는 일도 바로 음악학자들이 하는 일이다. 요즘에는 모두 피아노로 연주 하는 바흐의 많은 건반음악들이 사실은 원래 소리의 크고 작음을 표현할 수 없는 하프시코드를 위해 작곡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피아노 연주자들로 하여금 이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고려하여 제대로 된 바흐를 연주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그래서 서양예술음악의 본 고장인 유럽과 영미권의 대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음악학자들을 연주자들과 함께 키우고 있다. 음악학이 일찍부터 대학의 주요 전공으로 자리를 잡았을 뿐 아니라, 독일에서는 음악교육 기관에 음악학 전공이 없으면 음악대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학 음악교육의 주요 척도가 되어 있다. 미국의 유수대학들에서는 모든 연주 전공들이 수강하는 음악학 교과과정을 수립하고 행정 전반을 관장하는 학과가 바로 음악학과이다.

들리지 않는 음악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1980년대 서구의 음악을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 음악문화에 대해 초대 음악학자 이강숙이 ‘모국어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비평을 출간하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음악학은 아직도 전국의 10개 대학에만 개설되어 있어 대부분 다른 음악 관련 학과의 귀퉁이에 끼여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탁월한 음악학자의 양성 없이는 새로운 음악문화를 만들 수 없고, 연주 역시 서구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이화 음악학은 새로운 음악문화 창출을 위해 새로운 담론들을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연주, 젠더 연구, 음악문화 연구, 인문학과 사회과학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한 학제적 연구 등을 기본 연구 방향으로 삼고 새로운 음악학인 ‘통합 음악학(integrative musicology)’의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 음악학이 독립된 운영체제로서 새로운 정책 및 교과과정을 만들어 연주와 동등한 파트너로 대학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어야 비로소 균형 있는 음악 교육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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