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맑은 가을하늘과 살랑거리는 바람을 뒤로 하고 도서관에서 10월의 대부분을 보낸 뒤 시험이 끝난 주말, 요즘 가장 ‘뜨고 있다’는 새 드라마를 보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앉았다. 그런데 이건 무어란 말인가? 수업에 지각해서 뛰는 와중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학생들을 훑어보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며 ‘나름’ 멋있는 대사를 날리고, 결국 그 여자의 사랑을 쟁취하는 거칠고 ‘남자다운’ 주인공이라니. 그날따라 왜 그렇게 그 장면들이 기억에 남았는지 모를 일이다.

얼마 전, 이른바 ‘나영이 사건’으로 알려진 아동 성폭력 사건의 판결이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모든 언론의 관심은 어린 아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그에 비해 가해자의 형량이 얼마나 가벼운지에 관한 것이었다. 모든 국민은 사건의 끔찍함에 경악했고 국회의원들도 놀라서 어린이 성폭력에 더 강력한 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겠다고 떠들썩했고, 심지어 대법원의 판결을 바꾸자며 서명운동을 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이라는 말은 금기와도 같다. ‘폭력’이라는 단어에 ‘성’이라는 글자가 하나 더 붙어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앞에 새롭게 붙은 한 글자를 더 크게 해석하곤 한다. 때문에 피해자도 사건을 전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일종의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 사건이 ‘폭력’으로서 가지는 문제를 충분히 바라보지 못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 <나눔터>의 기고가 수(水)는 반항을 심하게 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성폭력 피해자들이 ‘성’적 관계를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권력관계와 힘의 위계질서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대단하게 멀리 있지도 않고 대단하게 끔찍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아주 작은 관계에서부터 생각해보자. 관계마다 있는 미묘한 힘의 차이로 인해서 오가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돈이 없어서, 물리적인 힘이 약해서 또는 약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위가 낮아서, 마음을 내주었기 때문에 ‘한 방 먹어야’ 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지 말이다.

이러한 폭력은 사회적 통념이나 시스템을 통해서 특정 집단에게 가해지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 행해진다는 여성 할례(女性割禮)의 경우가 그러하다. 여성 할례란 여자 아이의 성기를 바늘로 꿰매는 것으로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에 기반한 관습이다.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아도 어떤가. 우리 사회의 여성의 성 상품화 또는 성에 대한 관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한다.

드라마에서 남자가 자신을 거부하는 여자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면서 그 여자의 마음을 얻기를 바라고, 결국 여자의 마음은 움직인다는 설정이 어딘가 불편하다. 나는 별로 원하지 않는데 친구들은 ‘진도’ 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고, 많이 그렇게 하는 것 같던데, ‘쿨하게’ 그랬다고 하면 될 것 같다. 그렇지만 꺼림칙한 마음이 남는다. 성폭력 사건이 뉴스에 나올 때마다 여자니까 막연히 밤길이 무섭다. 혹시 여러분은 비슷한 답답함을 겪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성폭력, 그것은 그렇게 대단히 끔찍하지만도 않고 멀리 있지도 않다. 우리가 이해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폭력의 의미 내에서, 우리의 고민 속에서,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법부의 재판 결과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무엇이 그녀들로 하여금 폭력을 겪게 했는지, 무엇이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지 고민해 보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만드는 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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