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 침대에 누워 유일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말을 하고 싶지만 산소마스크 때문에 할 수가 없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전선들이 무섭다.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나는 죽음이 낯설다.
누군가의 마지막 이야기다. 그 누군가가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우울한 이야깃거리다. 열혈 청춘20대의 입에서 죽음이라는 말이 흘러나온다면 왠지 더 그렇다. 모든 것의 마지막. 그리고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일인 죽음은 ‘피해야 하는 이야기’가 된다.

일본의 죽음학자인 히구치 가츠히코는 ‘죽음에의 대비교육’이라는 책에서 죽음을 두렵다고 인식하는 가장 큰 요인은 절대적인 고독, 삶과의 완전한 단절에 대한 공포라고 기록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 실존 문제와 연결된 가장 핵심적인 공포에 해당한다. 그러나 죽음이 그저 공포스러운 것으로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인식될 경우 삶 역시 제대로 수용할 수 없게 된다. 인식의 전환은 죽음에 대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죽음준비교육’이라는 말이 있다. 죽음, 사별과 관련된 지식과 태도, 기술이 학습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교육의 의미는 죽음을 대비하는 태도와 대처를 배우는 것에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에도 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죽음의 정의에 대한 이해, 고통 완화 요법과 사별로 인한 상처 치유 등에 대해 배우는 것이 포함된다.

캐나다 킹스 대학의 죽음과 사별교육연구소는 학점인정과목으로 죽음학 관련 과목과 죽음학 자격증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독일에서 죽음준비교육은 중, 고등학교의 교과과정으로 채택돼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개설된 죽음 교육 과목은 1970년대에 이미 1000여 개를 돌파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필자는 나이에 맞는 체계적인 죽음 준비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제7차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보면 중등과정의 도덕 교과목을 통해 ‘자기 존중과 생명 존중’의 내용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명에 대한 교육이 죽음에 대한 이해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삶의 설계와 가치 추구’를 배운 적은 있지만 그 삶의 설계에 죽음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에서 죽음준비교육은 종교기관과 민간 사회교육기관, 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교육 내용은 대개 유서를 작성하거나 입관체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해보는 것이거나 호스피스와 제례의식에 대한 기초 교육을 받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죽음에 대한 교육이 미비한 지금의 시점에서 대학생인 우리에게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죽음학의 대가로 꼽히는 칼 베커(Carl Becker) 일본 도쿄대학 교수가 말한 대학에서의 죽음 준비교육에는 죽음에 대한 종교적, 사회학적 접근과 윤리적 문제에 대한 고찰이 포함된다. 죽음에 따르는 비용과 책임, 정책의 문제도 포함된다. 이 내용을 전문적인 교육기관의 도움 없이 혼자서 공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면 그것을 바꿔보려는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죽음과 관련된 수업을 찾아 들어보거나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죽음과 접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살고 싶다는 욕망은 궁극적으로 어떻게 죽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웰 엔딩(well­ending)이 웰빙(well­being)을 이끄는 것이다. 우리를 지배하는 최대의 공포인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삶에서 직면하는 모든 두려움에 대해서도 좀 더 의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닥쳐오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또는 죽고 싶다는 돌연한 충동 앞에서도 너무 약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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