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힘
스토리텔링의 힘
  • 한혜원 교수(영상콘텐츠전공)
  • 승인 2009.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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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이야기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향한 인류의 행보 자체가 천일야화와 같다. 인류는 잉여 시간이 생길 때마다 소설,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그릇을 빚고 그 안에 ‘끝없는 이야기(never ending story)’를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해왔다. 절대 반지를 노래하던 북유럽의 시인들, 절대 반지를 50만 단어로 집필한 J.R.R. 톨킨, 절대 반지를 557분 상영 분량의 필름으로 찍어낸 피터 잭슨, 절대 반지를 1000시간 플레이 분량의 온라인 게임으로 제작한 터바인社가 온갖 공력을 쏟아 부어 완성하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반지 이야기’이다.

인간은 어떠한 순간에도 이야기를 생산하고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의 서문에서 불행한 사람들의 고뇌를 덜어주기 위해서 열흘 동안 나눈 백 편의 이야기로 데카메론을 구성했다고 밝힌다. 이처럼 이야기는 인간 무의식과 욕망의 발현이요, 타인과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스토리텔링이란 ‘사건(event)’에 대한 진술이 지배적인 담화양식이다. 21세기의 스토리텔링은 다양한 내용, 형식, 기능을 포함한다. 스토리텔링이라는 문화적 개념에 기술적 접두어인 디지털이 결합해서 이루어진 합성 개념이 바로 디지털 스토리텔링(digital storytelling)이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란 스토리텔링이 디지털 미디어와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하는 중 나타난 개념으로, 디지털 기술을 통해서 디지털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생산하는 창작 기술이다. 다중사용자온라인롤플레잉게임(MMORPG), 대체현실게임(ARG), 사용자생성콘텐츠(UCC) 등 사용자(user)가 이야기 창작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 양식들이 주된 예이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일차적으로는 컴퓨터 기반의 정보 기술을 활용해 창작한 콘텐츠의 시나리오를 지칭하나 기술과 문화가 서로 상보적 관계를 이루며 발전해온 점을 상기할 때, 디지털을 단순히 전달 기술로 이해할 경우 오히려 스토리텔링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차단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스토리텔링은 인류의 역사를 두고 이어온 이야기 가치(story value)를 존중하고 답습하는 한편,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환에 따라 달라진 가치를 동시에 지향한다.

건물을 짓기 전에 컨셉을 설정하고 설계도를 그리는 것처럼, 스토리텔링은 인문학, 공학, 사회과학 등 이질적인 분야들을 통합할 수 있는 교량이자 설계도 역할을 수행한다. 인쇄 시대의 스토리텔링이 작가 1인이 집필한 종이 시나리오에 국한된다면, 디지털 시대의 스토리텔링은 콘텐츠의 기획 개발(development)부터 후반작업(post-production) 전체를 아우르는 3차원적 청사진이다. 인쇄 시대의 스토리텔러에게 작가의 고유성, 특수성, 천부적 창조성 등이 요구되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스토리텔러에게는 다양한 문화적 코드를 이해하고 조합하는 능력, 이를 가장 적합한 미디어를 통해서 보편적이고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디지털 시대의 대중은 스토리텔링이 생활 곳곳에서 공기처럼 뿜어져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야기는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과 같이 허구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에서 주로 발생하지만, 웹, 광고, 테마파크, 에듀테인먼트 등 사실에 기반을 둔 인포메이션 콘텐츠에서도 발생한다.

디지털 시대의 대중은 날마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무수히 많은 양의 정보를 접하기 때문에, 더 이상 객관적인 정보(objective fact)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정보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권력을 갖게 되는 일명 ‘아는 것이 힘’인 시대를 지나, 동일한 정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노출시키고 전달하느냐에 초점을 둔 ‘이야기하는 것이 힘’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에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주관적 경험(subjective experience)을 전달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기법이 각광받고 있다. 스토리노믹스, 스토리텔링 경영, 스토리텔링 마케팅 등 스토리텔링과 관련된 기술 및 기법들이 마치 새로운 듯(그러나 알고 보면 새로울 것 없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