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가지 일들을 준비하면서 바쁜 날들을 보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나의 내면에서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나에게 걱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직 준비가 안 끝난 것 같은데, 이 정도로 될까.” “아 정말 빨리 이걸 끝내야 다른 것에도 신경을 쓸 수 있을텐데.” 이러한 조바심의 원인은 바로 마음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불안정성에 대한 염두의 목소리였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오래전부터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확실한 그 무언가를 추구해왔다. 전혀 모르던 미지의 자연을 개척했고, 질서가 없던 세상에서 제도를 만들고 나름의 질서를 세워 사회를 구축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불안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보험에 가입하는 것까지, 사람들은 현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미래를 생각한다.
이렇게 미래를 걱정하는 인간의 본성과 현대 사회의 불안감이 만나면서 불안정성에 대한 두려움은 증폭되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용감한 선구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 불안정성은 ‘젊음’ 이라는 인생의 시기와 만나면 위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으며 가능성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오늘도 잠깐 본 뉴스에서는 취업난에 대해 안타까운 소리를 변함없이 쏟아내고 있었고, 매년 어떤 때가 오면 반복적으로 쏟아내는 걱정과 우려이기에 이제는 그런 이야기들이 단순한 걱정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걱정되는 것은 뉴스에서 말하고 있는 ‘경쟁’과 ‘어려움’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일대 관문에 대해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하고 있는 모습 그 자체였다.
막연한 우려와 걱정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 ‘진심어린’ 충고는 개인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공을 선택하거나 진로를 결정할 때, 불확실성과 가능성의 갈림길에 서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더 높은 확률과 안정을 지향하는 것이 보편적인 선택의 방향이다. 적어도 현재 우리 사회는 그렇게 선택할 것을 암묵적으로 권하고 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상황은 이상하기도 하다. 스스로 어떻게 살 지 선택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자유가 아니었던가. 인생에 있어서 당연하고 필수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용기’까지 낼 필요가 있는가 하고 말이다.
플라톤의 4주덕론에 따르면 머리는 지혜, 몸은 절제, 팔과 다리는 용기의 덕목을 의미한다. 여기서 머리도, 몸도 아닌 팔과 다리가 용기라는 것에서 용기는 발휘하는 동시에 실천을 동반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갈수록 치열해지고 힘들게만 느껴질 세상 속에서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불확실성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 선택할 용기가 필요하다. 당연한 듯 보이는 이 결정력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 보았던 광고가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걸음마가 늦으면, 영어 발음이 좋지 못하면, 대기업에 취업하지 못하면, 외제차를 타지 못하면,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일까 라는 물음을 던지던 광고였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소신’이 한 동안 뇌리에 남았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자유가 광고에서도 다루어지는 걸 보면 우리 사회에서 소신 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단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어려운 결정을 하는 ‘용기’를 내기는 힘들지만, 그 용기를 내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어차피 기회는 다시 오지 않고 후회는 반복될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