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본지는 8일(목) 스크랜튼 선생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스크랜튼」(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2008), 「한가람 봄바람에-이화 100년 야사」(지인사,1981), 「This Ewha-A Photo Essay By H. Edward. Kim」(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2002) 3권의 책을 통해 스크랜튼 선생의 발자취를 밟아 봤다.

1909년 10월8일(금)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미국 감리교회(미 감리회)의 첫 번째 조선 파견 여선교사가 묻혔다. 그는 1885년, 쉰을 넘긴 나이에 미국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조선에 왔다. 이후 24년 동안 남성에게 부속된 존재였던 조선 여성들을 위한 교육과 선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2009년 10월8일(목), 그가 묻힌 지 100년이 지났다. 그는 이화학당의 창립자 스크랜튼(Mary Fletcher Scranton) 선생이다.

△미지의 땅, 조선으로

1884년 10월, 스크랜튼 선생은 미 감리회 해외 여선교부의 조선 파견 첫 여선교사로 임명됐다. 스크랜튼 선생은 52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조선행을 쉽게 결정짓지 못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그를 움직였다. 스크랜튼 선생은 의료 사업을 담당할 조선 파견 선교사로 임명된 그의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과 함께 조선으로 향했다. 

1885년 6월20일(토), 서울에 도착한 스크랜튼 선생은 한 달 먼저 서울에 자리 잡은 아들의 집에 거하면서 선교 사업을 준비했다. 그러나 곳곳에 난관이 존재했다. 이양인들을 불신하고, 서양을 두려워하던 한국인들은 파란 눈의 이방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선생은 당시 상황에 대해 “우리가 부녀자가 있는 집에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그녀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 뒤로 숨어 버렸고 어린이들은 울부짖으며 달아났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를 살찌워 피를 빨아 먹는다는 등의 괴소문이 횡행하고 있었다.

서양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편견뿐 아니라 음식 문제도 겪어야 했다. 스크랜튼 선생이 직접 작성한 ‘The Korean Repository Ⅲ-1(한국에서의 여성사업)’에서 그는 당시의 어려움을 전하고 있다.
“그동안 아껴 온 음식물들은 나무통 속에서 모두 부패해 버렸다… 쇠고기는 병든 고기일 위험이 있어 먹지 못하였고 감자나 다른 채소들은 없었다… 할 수 없어 닭과 달걀만 내리 한두 달을 먹고 나니 나중에는 콧속에서 닭 냄새가 났다.”

△배꽃 흐드러지게 핀 언덕 위에서

1886년 11월, 서울 정동에 여학교를 세웠지만 학생은 모으기 쉽지 않았다. 조선에는 “여자는 교육할 필요가 없다”라는 인식이 확고했고, 여성들의 외출은 밤에만 허락돼 학생 모집이 원활하지 않았다. 여기에 콜레라까지 퍼졌다.

학교 건물이 완공되기 전인 5월, 스크랜튼 선생은 아들의 집에서 첫 학생을 만났다. “영어를 배워 황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관료의 소실을 교육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첫 학생은 병으로 석 달 만에 학업을 접는다.

6월, 두 번째 학생으로 꽃님이라는 열 살배기 소녀가 찾아왔다. 가난한 여인이 딸을 부양할 수 없어 맡긴 것이다. 그러나 이도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 “처음에는 좋은 음식과 옷을 주지만 나중엔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겁을 주자 곧 여인은 아이를 도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선생은 꽃님이를 미국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한 후에야 아이를 두 번째 입학생이자 이화학당 최초의 영구학생(permanent pupil)으로 삼을 수 있었다.

1886년 여름 서울에 만연한 콜레라로 서대문 근처에 버려졌던 별단이라는 아이를 스크랜튼 의사가 치료했다. 별단이는 두 번째 영구학생이 됐다. 네 번째로 이화학당을 찾은 학생은 훗날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터(김점동)였다.

이후 하나 둘 학생들이 들어오고, 조선인들의 서양인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1887년에는 학생이 11명으로 늘었다. 그해 2월 고종으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았다. 이는 국가로부터 교육 기관으로 인정됐다는 의미다.

△자유·사랑·평화의 여성 교육 열매 맺다

스크랜튼 선생은 이화학당의 교육 이념으로 “가부장적 굴레 속에 고통받는 여성들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진정한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서는 것”을 제시했다.

스크랜튼 선생의 이러한 여성 교육 목적은 파이크(L.G. Paik)의 저서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1929년)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한국 소녀들이 우리 외국 사람의 생활이나 의복, 환경에 적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만족한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스크랜튼 선생의 비문에도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사랑·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최슬기 기자 redwin2026@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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