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흐가 참 좋다. 누가 좋은 음악은 모든 성부가 함께 시작해야 한다고 했던가? 바흐의 곡은 자주 단 하나의 선율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오르간의 경우, 오른손, 왼손, 오른발, 그리고 왼발의 순서로 높고 낮은 음역에서 주제들이 하나씩 첨가되며 어느덧 “오로지 신만이 만들 수 있다”는 완벽한 소리의 우주를 형성한다. 동시에 수평과 수직으로 울려 퍼지는 음악 속에서 내 머리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한 시차를 갖고 재현되는 주제 선율 안의 엄격한 규칙과 질서를 헤아리는데, 내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하게 짜여가는 소리의 확장 안에서 마냥 부풀며 황홀한 춤을 춘다.

나는 이런 감동적인 음악을 만든 이들의 삶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해서 유학길에 올랐다. 언어와 문화의 타자였던 나에게 음악대학 바로 옆 학교 채플에서 흘러나오는 오르간 소리는 늘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결국 틈을 내어 시작한 오르간 공부는 나로 하여금 또 다시 뜨겁게 바흐를 만나게 했고 짧은 시간 안에 쟁쟁한 전공 학생들을 물리치고 채플의 예배 반주자로 선택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이 사건은 문화의 외부인으로서 느끼는 나의 소외감을 상당 부분 씻어주었다.

독일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나 일생을 그 근처에서만 맴돈 바흐가 어떻게 훗날 ‘음악의 아버지’ 또는 ‘작곡가들의 태양’으로 추앙 받게 되었을까?

그의 성공 키워드는 융합과 창의였다. 첫째, 그는 프랑스의 관현악곡 및 춤곡의 전통과 이탈리아의 오페라 음악의 전통을 자국의 전통과 융합하여 음악의 새로운 문법과 언어를 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둘째, 그는 음과 음 사이를 수학적으로 나눈 평균율의 가능성을 건반음악의 구약성서라고 불리는 48곡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통해 서양음악의 장ㆍ단조 화성체계를 확립했다. 그가 완성한 다성음악 또는 푸가 기법은 근대과학의 기초를 확립한 뉴턴의 이론에 비견되는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 자리에 등극하는 데에는 당시 독일 학자들의 치밀한 ‘음모’가 큰 몫을 했다. 1799년에 출간된 독일 음악신문에는 ‘작곡가들의 태양’이란 도형이 실렸는데, 바흐는 태양을 상징하듯 한복판에 위치한 반면, 당시 더 잘 알려진, 독일에서 출생했으나 영국인으로 귀화한 헨델, 그리고 이미 당대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명성을 확고하게 굳힌 하이든이 주변에서 그를 에워싸고 있다.

1802년에는 드디어 바흐 학회가 설립되며, 음악학자 포르켈은 음악가에 대한 전기로는 최초로 바흐 전기를 집필한다. 포르켈은 그의 집필 목적이 독일인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함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한다. 1829년에 멘델스존에 의해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초연되면서 그의 음악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정전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19세기 중반부터 그의 작품들이 출판되고, 세기 말에는 음악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분야인 음악학[musicology]이 독일에서 태동하면서 바흐에 초점을 맞춰 독일 음악의 위대함을 증명하려는 연구 결과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타고난 음악성과 항상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한 성실함이 바흐를 위대한 작곡가로 만든 것이 사실이지만, 독일 학자들의 체계적이며 끈질긴 연구와 집필이 없었더라면 바흐는 절대로 2세기가 넘도록 ‘음악의 아버지’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 음악의 주변국이었던 독일이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려서 단순하게 소리로만 이해하던 바흐를 그 당시 유럽의 시대사상, 종교, 철학, 경제, 정치 등의 콘텍스트를 통합하여 학문적으로 다시 만나며, 음악문화의 변방에 위치한 한국의 음악학자로서 나는 바흐와 독일을 세계 음악의 중심으로 우뚝 세운 독일의 음악학자들처럼 함께 음모를 꾸밀 그런 학자들도 키우고 싶다.

그러나 연주 중심의 우리 음악계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비평 없이 받아들여진 서양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신화’를 재평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학자들을 양성하는 일이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소리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 사라 장을 여럿 더 키우는 것보다 음악학자의 양성이 더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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