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교시 공강이 되어 친구들과 기분 좋게 학교 앞에 자주 가는 식당에 둘러 앉아 점심을 먹었다. 열두시 반이 넘어 식사를 주문하여 한시가 조금 넘어서 다들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점심을 먹는데 30분정도가 걸린 셈이었다. 한 친구가 이야기를 꺼냈다. “유럽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면 정말 천천히 나와서 답답해.” 식사시간을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즐기길 원하는 유럽인들에게는 학교와 직장에서의 점심시간이 매우 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기 가면 참 답답해서 못 살거야.” 누군가 덧붙였다.

올 여름 나는 중국에서 중국 대학생들과 함께 물이 공급되지 않는 마을에 우물을 만드는 자원 활동을 하였다. 생각보다 상황이 열악해서 소위 ‘삽질’로 땅부터 파야 하는 상황임을 알고 한국과 중국 학생들 모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삽질에 능숙할 리는 없었지만 다 덤벼보라는 마음으로 떠난 곳이었기에 모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이 한참을 정신없이 일하고 나서 조금 쉬자고 모여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어도 중국 학생들에겐 도저히 삽을 내려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것이 바로 ‘대륙의 힘’이라며 감탄하고 있을 때, 그들의 삽질에서 ‘수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국 학생들이 숨을 헐떡이며 삽을 땅 속 깊숙이 밀어 넣어 흙을 파낼 때, 중국 학생들은 지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땅을 파내며 느릿느릿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일했으니 조금 늦게까지 일하는 그들과 ‘짧고 굵게’ 일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새삼스런 차이를 발견하였다.

어떤 삶의 방식에서는 빨리 하고, 또 어디에선 느리게 한다.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왜 우리는 빨리 밥을 먹고, 빨리 일을 해치우며, 빨리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현대 사회에서 빠르고 편리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높은 삶의 질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빠르고 편리한 생활은 정말 우리의 삶이 더 풍요롭고 윤택해 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린 걷는 대신 자동차를 타면서 시간을 줄이고 계단을 오르면서 다리가 아픈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서 힘을 절약하여 일과 후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데에 사용한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버는 대신, 시간을 아껴주는 기술을 사는 데에 더 많은 돈을 사용한다. 농기계가 줄인 노동력 덕분에 농촌에서 도시로 공부하러 간 청년은 농기계를 만드는 데 사용될 기술 연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도 북부의 라다크 지역을 연구해온 환경운동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변해가는 라다크 사람들이 내게 가르쳐 준 가장 놀랄만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현대 세계의 생활도구와 기계들이 그 자체로는 시간을 절약하게 해 주지만 그것들을 사용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새로운 생활은 전체적으로 시간을 빼앗아가버리는 효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우린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 기술의 발달이 무의미하다거나, 문화의 차이가 기술의 차이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인들이 음식을 빨리 만들어 내올 능력이 없어서 느리게 식사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중국 학생들이 힘이 없어서 천천히 일을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정말 절약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오늘도 정문에서 포스코관에 가는 길에 ECC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는 집에 돌아가서는 러닝머신에서 조금 더 뛰어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들과 대화를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점심시간을 빠른 식사와 잠으로 채우고 밤에 느껴지는 외로움을 무한도전을 다운받아 달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이 기술이든 삶의 방식이든, 빠르고 쉬운 것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합리적인 선택일까.

시간을 쪼개서 정말 바쁜 학기를 보내는 중에도 잠시 숨을 고르고 상쾌한 가을바람이 다가온 것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 조금은 느리게 가자. 빠른 것이 꼭 빠른 것은 아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