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 안에 나만의 명소를 만들자
이화 안에 나만의 명소를 만들자
  • 이채현 편집부국장
  • 승인 2009.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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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가 시작됐다. 수강 정정 기간도 끝났고 이제 학업에 몰두할 시간이다. 도서관은 붐비고, 학교의 각 기관 역시 새로 시작된 프로젝트들로 바빠 보인다. 여전히 분주한 개강이지만, 계절 탓인지 1학기보다 2학기의 학교는 좀 더 차분한 느낌이다. 우왕좌왕하던 신입생들에게 학교가 조금 익숙해졌고, 마지막 학기를 보내는 고학번들에게는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이기 때문일까.

 때로 학교와의 이별은 고학번들에게 압박으로 다가온다. 지난해 2월 한 온라인 취업사이트에 따르면 취업준비생 10명 중 7명이 우울증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취업포털 커리어(career.co.kr)가 1월20일(화)~23일(금) 대학생 67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85.7%의 학생들이 스펙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겪는 증상으로는 무기력증(56.4%)이 가장 많았고, 우울증(43.0%)이 뒤를 이었다.

옛 사람들은 마음이 팍팍할 때면 자연 풍광을 즐기곤 했다. 취업, 시험 등으로 정신없을 졸업반 이화인들에게도 학교 안에서나마 가을을 느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래전 졸업한 선배들 역시 학보사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면 으레 ‘해질녘의 이화교’, ‘본관 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 등을 추억했다.

필자가 추천해주고 싶은 첫째 명소는 늦은 저녁, 대강당 계단이다. 이곳에서 혹시 넘어질까 계단만 보고 걸어서는 안된다. 시선은 정면 위쪽, 구름 없는 가을날이면 그 지점에서 총총히 빛나는 별을 볼 수 있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 밤이면 우주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이 든다.

둘째 명소는 기숙사로 오르는 경사길이다. 지대가 높은 기숙사 근처의 경사길은 교내에서 단풍을 가장 일찍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힘겹게 길을 오르다 보면 옆쪽으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 해가 뜰 무렵이나 노을 질 무렵이 특히 장관이다. 눈이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엔 서울 시내가 스노우볼 속에 들어가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쁜 삶 속 이런 명소에서 감정을 정화시키는 것도 좋지만, 이화 안을 다시 보며 졸업 전에 추억의 장소를 만들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우리나라 장애인의 대모인 황연대(의학·63년졸)씨에게도 추억의 장소가 있다. 황연대씨는 본지와의 인터뷰 당시, 그가 힘들 때마다 김옥길 전 총장이 도왔던 일을 떠올리며 눈가를 적셨다.

그런 황씨에게 있어 본관 계단은 김옥길 전 총장과의 인연을 만들어준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다. 황씨는 재학 시절, 본관에서 진행됐던 김 전 총장의 수업에 자주 지각했다. 의과대학 건물과 멀기도 했지만, 불편한 다리로 무거운 가방을 메고 계단을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김 전 총장은 지각이 잦은 황씨를 크게 혼냈다. 후에 황씨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게된 김 전 총장은 “다리 아픈 아이인 걸 모르고 혼낸 일이 너무 가슴아팠다”며 그의 다음 학기 등록금을 대신 납부해줬다. 그 후 황씨와 김 전 총장의 인연은 계속된다.

소설가 정미경(영문·82년졸)씨의 추억의 장소는 기숙사 뒤 팔복동산이다. 마산에서 홀로 상경한 그는 서울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하숙집 밥상머리에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잦았다.

정씨는 마음이 공허해질 때마다 기숙사 뒤 팔복동산을 찾았다. 그는 그곳에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대도시의 차가움을 이겨냈다. 입학 후부터 그렇게 쌓은 소설에 대한 사랑으로, 정씨는 3학년이 되던 무렵 생애 첫 단편소설을 썼다. 그 작품은 이대학보사가 주관하는 ‘이화문학상’에 당선됐고, 정씨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인터뷰를 위해 선배 이화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이화의 풍경을 삶의 한 부분으로, 고향처럼 추억하고 있었다.
취업과 시험으로 현실이 어둡고 힘들더라도 잠깐 짬을 내 가을을 맞고 있는 이화를 다시 보자. 황연대씨에게 ‘본관 계단’이 있었고, 정미경씨가 ‘팔복동산’을 찾았듯 졸업을 앞둔 우리에게도 이화 내 어떤 장소가 인연을 만들어줄지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