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의 손때가 묻은 서예도구들과 가지런히 펼쳐진 누런 속지의 고서적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최순우 옛집’은 70여년 전 그대로 시간이 멈춰있다. 1930년대 지어진 이 한옥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한 최순우 선생이 1976년부터 1984년 사망하기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곳은 성북동 한옥의 양옥화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 것을 2002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매입, 복원해 ‘시민문화유산 제1호’라는 별칭을 얻었다.

“역사적 인물의 정취가 깃든 장소를 보전하는 것은 그 인물에 대한 기억과 도시의 역사적 추억을 보전하는 것이죠. 최순우 옛집은 서울의 몇 안 되는 소중한 ‘기억의 장소’입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김홍남 공동대표는 최순우 옛집의 가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본교 김홍남 교수(미술사학과)가 공동대표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2000년부터 시민의 자산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 및 문화자산을 매입, 시민의 소유로 보전하는 시민환경운동을 펼치고 있다.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우리말로 ‘국민신탁운동’이라 불리는 이 운동은 개발위협에 노출되거나 관리소홀로 파손위협에 직면한 자연·문화유산을 보호하는 활동이다.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은 1895년 영국에서 시작돼, 현재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시민문화유산 1호 최순우 옛집, 강화군 멸종위기 야생식물 매화마름 군락지, 희귀동물 서식지인 동강 제장마을 등 7개의 시민유산을 지정, 보전하고 있다. 확보한 자산의 운영과 관리는 시민들의 손으로 이뤄진다.

김 대표는 “현장을 잘 알고 그 지역의 정서를 가진 현지 주민들이 직접 관리한다”며 “지역공동체가 스스로 운영하면서 그 지역의 자연, 문화유산을 보전할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강화 매화마름 군락지는 이전 소유주를 명예관리인으로 임명했고 나주 도래마을 역시 현지 주민의 손길로 유지, 관리되고 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시민들이 직접 시민 유산을 즐기고 체험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김 대표는  “자연환경, 문화유산 자체가 현장박물관인 셈”이라고 말했다.

매달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후원금을 내는 박은주(행정·99년 졸)씨는 매화마름 군락지에서 벼 모종 심기 행사에 참여했다. 박씨는 “자연유산, 문화유산 보전이라면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 매화마름이 자라는 논일 뿐이었다”며 “이런 작은 유산들이 하나하나 모여 우리의 문화가 계속 보전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연·문화유산 보전에 있어 넘어야 할 산은 한두 개가 아니지만 재정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재정의 대부분을 회원이 부담하는 소액의 회비와 기부금으로 조달하다 보니 예산이 부족한 실정이다. 김영희 총무부장은 “최순우 옛집 같은 한옥들은 전문적인 보수, 유지 및 관리비용이 많이 든다”며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신두리 해안사구 등 자연유산도 외래종 식물 제거작업 등으로 지출이 많다”고 말했다.

이처럼 어렵게 확보한 자산들이지만 관련 법 규정은 미비한 상태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확보한 자산이 각종 관련법에 의한 개발행위로부터 훼손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2006년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현행 국민신탁법에서는 해당지역의 개발지구 선정이 가능해 확보자산의 영구보전이 어렵다. 

김 대표는 “정부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문화유산, 자연자원을 찾아 시민 스스로가 보전하는 만큼 완전히 보호받을 수 있는 법 개정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이은지 기자 eunggi@ewhain.net  
사진제공: 한국내셔널트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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