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하이서울페스티벌’ 개막식에 시위대 1300여 명이 난입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개막식은 취소됐고, 서울시는 4억여원의 손실을 입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올해 하이서울페스티벌은 일본의 황금연휴와 중국의 노동절 휴가와 맞물려 역대 최다의 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할 것으로 기대됐었다. 개막식이 취소되자 외국인들은 길을 막은 경찰들에게 화를 내거나 전화로 친구들에게 성토했다. 한 외국인은 “한국이 미쳤다.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벌어진 촛불집회 1주년 행사였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물론 좋은 일이다. 촛불시위도 정당한 명분이 있다면 괜찮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외치며 무대로 뛰어든 것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가 결여된 행동이었다.

인간이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의사소통이다. 국민 간 합의에 따라 운영되는 민주 국가에서는 이 소통이 더욱 중요하다. 물론 빈부차이에서 비롯된 사회적 갈등이나 과제는 남아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고도로 발달된 민주주의 국가’라는 평을 받는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적어도 현재 한국에서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권이 지켜지고 있으며, 누구나 투표할 수 있고, 삼권분립이나 다당제도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지 않은가. 그 제도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정부의 이기심만이 아니다. ‘합의를 위한 대화’ 자체가 결여된 사회구성원들의 탓도 크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는 구성원 간 소통으로 그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물론 대화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동등하지 않은 위치에서 일방적인 피해를 당하거나 이익을 얻을 때 그렇다. 억울하게 억압 받는 사회적 약자가 시위하고 저항(투쟁)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저항이 잘못된 폭력으로 번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앞서 말한 무단 점거 시위가 그 예다. 축제를 지키려던 경찰들이 폭행됐고, 시민과 관광객들은 분노했으며, 나라 이미지는 적잖이 손상됐다. 시위대는 1천여명이었지만, 정치 이념과 상관없이 축제를 즐기려다 피해 입은 시민은 3만여명이었다. 이는 결국 소수의 저항을 넘어, 특정 가치관에 근거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피해를 입힌 것에 불과하다.

비슷한 문제점은 온라인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정당한 근거 없이 특정 대상을 깎아내리고 공격하는, 이른바 ‘악플’이 그것이다. 인터넷 상의 비판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프랑스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필리프 퐁스 기자는 한국인들이 인터넷 상으로 정치의견을 표출하는 것을 “인터넷을 통한 직접민주주의”라고 특징짓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위에서건 댓글에서건 국회에서건, 폭력적 언행까지도 의견 표출이라는 이름으로 줄곧 정당화되는 현상이다.

사회 갈등을 민주적으로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토론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토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토론할 기회도 더 많아져야 한다. 토론은 토의나 일방적 설득과 달리 엄격한 형식과 예의로써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동시에 자신의 논리를 상대에게 관철시키거나 수정할 수 있는 대화법이다. 매너를 상실한 의견표출, 근거 없는 비난이 만연한 사회에는 더욱 필요한 소통방식이라 할 수 있다. 대학에서 토론 교육이 더 활발해져야 함은 물론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토론의 중요성을 역설한 책으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권한다. 여기에 책의 일부를 인용한다.
‘민주주의와 귀족주의, 사유제산제와 평등, 협동과 경쟁, 사치와 금욕, 사회성과 개인성, 자유와 규율 등에 있어서는 각 요소가 공평한 취급을 받기 어렵다. 저울의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내려간다… 어떤 종류의 의견이든, 부당한 논리를 변호하거나, 악의, 고집불통, 불관용의 감정을 나타내선 안 된다… 의견의 충돌에 영향을 받는 것은 흥분한 당사자가 아니며, 충돌하는 논리들에 설복되고 지지해줄 사람은 결국 냉정하고 사심 없는 제3자다.’

박현주 (대학취재부 차장) quikson@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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