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당시 전남대 정문에서 계엄군과 학생들이 대치했다.
전투경찰이 대학을 점거하고, 정부는 휴교령을 선포한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탱크가 등장하고 시위와 집회가 곳곳에서 일어난다. 1980년 5월 민주화 항쟁 때의 모습이다. 다가오는 5월18일을 기념해 온 국민이 민주화를 외치던 시절 이화를 되짚어봤다.

△1980년 5월, 이화에도 민주화 바람
5·18 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80년 5월, 본교 총학생회(총학)는 그 달을 ‘이화 민주화 투쟁의 달’로 정하고, 첫째 주부터 넷째 주까지를 각각 ‘이화 민주화 토론 주간’, ‘이화 민주화 투쟁 주간’, ‘이화 민주화 실천 주간’으로 정해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 5월17일(토) 정부가 선포한 계엄령으로 본교는 투쟁 도중 휴교됐다. 당시 3학년이던 박경미 교수(기독교학 전공)는 “휴교령 선포 직전엔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다.

1980년 5월12일(월) 본지의 보도에 따르면 ‘이화 민주화 토론 주간’이었던 9일(금) 오후에는 5천여명의 본교 학생이 모여 개헌과 중선거구제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경찰이 순식간에 본교를 둘러쌌고, 오후5시10분 경에는 사복형사가 침입해 교내가 소란스러워지기도 했다.

학생들은 교문 밖에서 대치하던 전투경찰에게 간식을 나눠주며 “서로 이해하며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 나가자”고 다독이기도 했으나, 오후9시에는 다시 교문을 사이에 두고 전투경찰과 대치해야 했다. 9시간의 민주화 토론이 끝난 오후11시에도 2천여명의 학생은 학교에 남아 밤새 버텼다. 당시 2학년이었던 이사란(정외·83년 졸)씨는 “학교가 매일 비상사태였다”며 “학생식당에서 전국 학생 회장단 회의가  열리자 무장군인들이 들이닥쳐 학생대표들을 연행해가기도 했다”고 했다.
 
△이화 교수 3백여명도 민주화 투쟁 지지
1980년 5월8일(목) 본교 교수 300여명은  긴급 임시 전체 교수 회의에서  ‘학원 내 체제를 민주화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고 노력하고, 나라의 민주발전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자’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교수들은 이어 교내 민주화 학생운동에도 지지를 표명했다.

같은 날 정오에 열린 대의원총회에서는 ‘이화 민주화 투쟁에 임하는 대의원의 자세’라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이 총회에서 학생처장은 본교 교수 일동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5월 민주화 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토론을 전개했다. 토론 끝에 대의원회는 9일(금) 오후, 학교 수업을 중지하고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서울 20여개 대학 총학생회장 모여
본교를 비롯한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등 서울시내 20여개 대학 총학생회장들도 모여 의기투합했다. 1980년 5월9일(금)~10일(토) 고려대에 모인 학생대표들은 “평화적 학생시위로 개헌의 불필요한 지연에 반대하자”고 결의했다. 당시 2학년이던 황인희(사회생활·83년 졸)씨는 “학교 밖에서 3명 이상만 모여도 집회 허가를 받아야 했다”며 “대학로에 탱크가 등장해 시민을 위협하기도 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김재은 기자 tia214@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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