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송(국문·07).
‘~lsm’이 붙어 특정한 이념이나 체제 등을 나타내는 단어는 지금 당장 세 가지만 대보라 해도 스스럼없이 꼽을 수 있을만큼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렇다면 혹시, ’에이지즘(Ageism, 고령자차별주의)’을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2008년 2학기에 수강했던 ‘비교여성연구’ 수업에서 필자는 ‘중년여성들의 성(性)’을  주제로 발표할 때 처음 만난 단어이다. 본래 의도는 사회에서 철저하게 금기시하고 왜곡하는 중년여성들의 성을 재조명하고 이해하자는 것이었는데, 발표 후 이어진 질의응답과 코멘트를 통해 필자조차 모르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를 기준으로 하여 특정 집단을 설정하고, 그들을 ‘특별한 잣대’로 재단하려 했던 시도가 알고 보니 모두 에이지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언가 거창하고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우리는 매우 자주, 그리고 무심코 한 살이라도 더 많은 나이를 두려워하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당신들의 일일 수 있는 일화 세 가지만 들어보자. 2009년이 밝았을 때 친구들과 농담 삼아 했던 말. “나 새내기일 때는 05들보고 고학번이라고 했는데. 이제 우리도 그렇게 불리겠다.” 두 번째, 친구가 은근히 찔러준, 별 신빙성은 없는  루머 하나. “결혼정보회사에 22살 전에 가입하면 재벌이랑 연결시켜준대. 우리 이번이 마지노선이야.” 마지막으로 선배의 한 마디. “조만간 너도 20대 중반이구나. 끔찍하지?”

스물 둘의 도래와 함께 다가온 세상의 속삭임은 생각보다 노골적이었고 불편했다. 어찌 보면 ‘겨우 스물두 살’이지만, 겨우 스물두 살짜리에게도 세상의 에이지즘은 이렇게 명백한 폭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감히’ 언급하고자 한다. 부족한 배움과 경험을 믿고 망아지처럼 날뛰며 나이듦에 관하여 이야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러한 에이지즘에 매몰되어 있고 순응하며 때로는 자발적으로 그 체제를 공고히 하는 주춧돌(!)이 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젊다는 것이 곧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특권으로 여겨진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이다. 헌데 최근에는 젊음이 지닌 창조성과 왕성한 생명력보다 젊음 그 자체를 숭배하고 나이듦을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에이지즘이라는 단어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특히나 에이지즘은 여성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연합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이화인에게 묻는다. 타 학교의 20대 후반 혹은 그 이상의 남자 선배를 만난 적은 있어도, 학번이 까마득하게 높은 여자 선배가 동아리에 그처럼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는지. 한국사회에서 나이가 많은 여성은 어린 여성보다 열등하고, 부끄러워해야 하고, 자중해야 하는 존재로 간주된다. 어린 여성은 어리다는 것만으로도 우위를 점한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라는 가사가 정말 어려서 싫다는 항변으로 들리는가?

이러한 에이지즘은 자본주의와도 손쉽게 결합한다. 백화점에 가서 아무 화장품 매장이나 들어가 천진하게 말해보자. “저, 스킨이랑 로션밖에 안 쓰는데요.” 점원들은 뒤로 넘어갈 듯 호들갑을 떨며 무수한 안티 에이징(Anti-aging)제품을 보여줄 것이다. “손님, 그러면 큰일 나요. 노화는 스무 살부터 시작된다니까요.”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춘은 순식간에 늙기 시작한데다 스스로를 방치한 파렴치한으로 전락한다.

동안요가 비디오까지 출시되는 시대에, 도처에 널린 에이지즘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너무나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에이지즘의 폭력을 인지하고 거부하려는 의지라고 말하고 싶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거부하는 데에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가 가능해진다.

‘우리가 벌써 ~살이라니, 징그럽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고 다닌다면 의식적으로 입을 다물어보자. 일그러진 세상은 여전히 우리를 부추기겠지만, 스스로 깎아내리길 멈추는 것만으로도 의미깊은 일이다. 세상이 내놓은 요상한 잣대에 맞춰 자신과 타인을 늙었느니 한창 좋을 때니 재단하기에는, 우리 한 명 한 명이 너무 소중하고 다양하지 않은가.

이진송(국문·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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