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디자이너 이광희(비서학·74년 졸).
이광희, 그의 이름은 곧 명품으로 통한다. 역대 영부인을 비롯한 정계의 유명 인사들이 이광희(비서학·74년 졸)의 옷을 찾다보니 ‘대한민국 1%의 옷을 만드는 사람’이란 칭호가 자연스레 붙었다. 5일(화) ‘이광희 부티크’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규모는 작아도 멋있고 개성적인 의류를 취급하는 점포’를 뜻하는 부티크(boutique), ‘이광희 부티크’에도 그만이 낼 수 있는 멋이 있다. 남산 하얏트호텔 옆 흰 건물의 부티크에 들어서면 잔잔한 팝송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쇼윈도에서 이씨가 만든 옷을 입고 서있는 마네킹 뒤로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캠벨 통조림이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다.

“패션이란 단순히 입는 옷이 아니라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문화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어.” 패션에 대한 그의 이런 철학 때문일까. 그의 부티크는 옷을 파는 ‘가게’가 아닌 예술작품들이 전시된 우아한 ‘전시장’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고급스러움은 이광희씨가 추구하는 미학이다. 이 때문에 그가 만든 옷 한 벌은 2백만 원~3백만 원을 호가한다. 홍라희씨와 같은 각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는다. 그러나 그의 지향점은 클래식(classic)이 아닌 모던(modern)이다. 그는 언제나 새로움을 향해 도전해 왔다. 런웨이의 화려함을 담은 패션쇼를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사람도 바로 이씨다. “그 때는 의자배치, 테이블 세팅에 관한 개념이 아예 없었어. 밤새 테이블 보와 의자커버를 만들었지.”

패션쇼 입장 티켓을 판매하는 일도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 가수 조용필의 콘서트 티켓은 4만원, 이씨는 그의 패션쇼 티켓을 6만원에 판매했다. “무모하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지.”주변 사람들의 우려 속에서 그가 티켓 판매를 고집한 이유는 “패션도 공연할 수 있는 예술의 한 부분”임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패션쇼에 왔던 사람들이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지. 6만 원이 절대 아깝지 않게 하려고 이를 악물고 준비했어.” 지금은 디자이너들의 정기행사로 완전히 자리잡은 봄·여름, 가을·겨울 정기컬렉션을 한국에서 처음 시도한 것도 그다.

그는 이처럼 패션세계에서 일한 30여년 간 문화를 창조해왔다. 3월 ‘미디어 퍼포먼스 봄의 제전Ⅲ’은 예술의 전당 무대에서 진행된 최초의 패션쇼다. 그는 컬렉션 때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작품을 패션에 접목시켜 왔다. 1988 서울올림픽에서는 고(故) 이항성 화백과 함께 작업한 의상이 소개되기도 했다. “김중만 사진작가 같은 예술가들과도 호흡을 맞췄지. 웬만한 예술분야에는 손을 다 뻗쳤어.” 

‘바늘천사’, 패션계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가 개최한 조손가정, 독거노인, 북한산모 등을 위한 후원패션쇼와 바자회는 사람들이 그를 ‘바늘천사’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냥 좋으니까 하는 거지. 뭐 다른 뜻이 있나?” 자선행사를 기획한 계기를 묻자 그는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웃고 만다.

그의 정규 컬렉션에는 매번 자선바자회가 함께 개최된다. 이는 그가 만든 철칙이기도 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아휴~ 그런 건 아니야. 기왕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라면 기부를 통해 서로 나누자는 취지지.” 그의 삶 자체가 ‘노블리스 오블리제’(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친다. “내가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갖고 있는 것을 나누는 것뿐이지. 나도 그들로부터 얻는 바가 크니까.”

얼마 전에는 탤런트 김혜자씨와 함께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지역으로 7박8일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고…. 이럴 필요가 뭐 있어. 아이들이랑 놀아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기도 바빴지.” 그는  봉사활동 중‘망고나무 프로젝트’를 구상해내기도 했다. “슈퍼에도 먹을 음식이 없어. 아이들이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망고란 걸 알고 집집마다 망고나무 한 그루씩 심어주면 어떨까 싶었지.” 망고나무는 잎이 무성해 큰 그늘을 제공하고, 심은 지 7년이면 비타민이 풍부한 열매가 열린다.

“망고묘목을 심으면서 메마른 땅의 묘목이 망고가 주렁주렁 달린 아름드리 나무로 변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더라고. 망고나무 자라는 모습 보러 앞으로도 수단에 자주 가게 될 것 같아.”
그는 가장 낮은 자세로 자선을 행하는  대한민국의 탑 디자이너다.
 
강애란 기자 rkddofks@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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