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상반기, 나는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에서 인턴십을 했다. 많은 후배와 동기들이 국외 인턴십을 하고 싶어하고 어떻게 자리를 구할 수 있는지 묻는다. 정보와 조언을 얻고 이를 토대로 안전하게, 문제없이 인턴십을 해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실 나는 아무런 계획도 다짐도 없이 2007년의 마지막 날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에는 워싱턴이 아닌 매사추세츠의 뉴튼(Newton)에 두 달간 머물렀다. 보스턴에서 버스로 반 시간 가량 떨어진 곳이다. 도착하니 밤 9시. 주택가인지라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집주인 할머니마저 무릎 수술로 부재중이었다. 며칠간 외출도 할 수 없을 만큼 눈만 펑펑 왔고 아무도 없는 남의 집에서 내가 여기 왜 왔는가를 생각했지만, 답은 없었다.

답은 갑자기 찾아왔다. 당시 오바마와 그의 경쟁자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의 첫 예비선거인 아이오와 코커스(caucus)를 앞두고 한창 경합 중이었다. 내가 매우 중요한 순간에 미국에 왔고 적절한 기회를 앞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정치의 중심지 워싱턴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이후 정신없이 일을 진행했다.

연고 하나 없는 곳에서 제대로 갖춘 것이 없는 학부생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부딪치는 것이었다. 영문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쓰는 법을 검색하고 어설프게 글을 써 내려갔다. 워싱턴에 있는 연구소, 시민단체, 대사관 사이트에서 발견한 전자 우편 주소로 무작정 내 이력서를 보냈다. 그 때는 전자 우편 주소가 누구의 것인지, 그가 어떤 부서에서 일하는지도 몰랐다. 인턴십 프로그램이 있건 없건 보수를 주건 말건 나는 열심히 일하고 싶고 뛰어난 조력자가 될 자신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학 전공자이기까지(?) 하다면서 나를 써 달라고 주장했다. 거절과 위로가 거듭되다 마침내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대학원의 한미연구소(U.S.-Korea Institute)에서 긍정적인 답이 왔다. 전화로 면접을 봤고 책임자는 보조 연구원으로 함께 일해 보자고 했다.

그런데 당시 나는 비자, 보험, 워싱턴에서의 숙식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연구소에서 무보수 인턴의 신분과 숙식을 보장해 줄 리 만무했다. 수소문 끝에 한국인 법률상담소의 직원과 수차례 통화를 했고 비자 문제를 해결했다. 떠나기 직전에 비행기표를 예약했고, 워싱턴에 도착한 첫날에 트렁크를 끌고 시내를 누비며 살 집을 찾아봤다. 우여곡절 끝에 집값이 저렴한 흑인 마을로 향하게 됐고 내 사정을 이해해준 네 명의 흑인 자매들 덕에 그 집에 짐을 풀었다.

인턴십을 하며 나는 생생한 현장에서 기대 이상의 경험을 했다.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의 저자인 돈 오퍼도퍼(Don Oberdorfer)를 비롯해 각국 외신기자들과 한국 특파원들, 미국 의회 사무관들, 브루킹스(Brookings)를 필두로 한 세계적 연구소의 전문가들, 국무부의 정책 결정자들, 비정부기구(NGO)의 대표들, 각국 외교관들을 만나 배우고 깨닫는 나날이 계속됐다. 힐러리와 오바마의 예상 내각 시나리오(Potential Cabinet), 한미(韓美) FTA에 대한 외신의 반응 등에 대한 연구와 보고서 완성을 끝으로 인턴십을 마무리했고, 나 역시 보다 다듬어진 인간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할 때 준비, 조언, 정보 따위보다 중요한 것은 일단 ‘떠나는 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명확하게 떠오르고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 낯선 곳에 나를 던져 놓고 불현듯 찾아오는 영감 혹은 전환점을 언제든 받아들일 수 있게 자신을 열어두자. 준비를 하지 못해 부족할 것이라고, 위험할 것이라고 겁내지 말자. 영감이 떠오를 때 주저 없이 움직이고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시험하자. 낯선 사람을 믿어보면 행운의 여신은 내 편이 된다. 신은 끝없는 불명확과 불완전 속에서 살게끔 우리를 창조했다. 완벽한 계획, 완벽한 실행이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자기 세계를 열어나가려는 ‘끈질긴 패기’와 ‘순간의 결단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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