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전공자가 아닌 내가 여성 고위관리자, 혹은 여성 리더들을 연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여자 박사가 극소수였던 이전 직장 국책연구기관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전공분야 외에 여성고용관련 과제도 맡고 있던 차, 정부부처에서 일하고 있던 대학 선배가 기업에 여성 관리직이 너무 부족하다며 또 다른 연구프로젝트를 하나 더 떠안겼던 것이다.

여성이 약진하고 있다는 사회적 통념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은 조금 다르다. 여성고용률과 남녀 임금격차는 여전히 OECD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며, 국회 여성의석 비율, 기업 여성고위직 및 전문직 여성비율, 그리고 남녀 소득비 등을 기준으로 하는 여성권한척도(GEM)도 2008년 경제규모 세계 13위 국가의 위상에는 부끄러운 68위였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경제위기시에는 여성직원이 남성 가장의 일자리보호를 위해 암묵적인 양보를 요청받으며 불안정고용과 해고의 위험에 가장 먼저 노출된다. 여성의 고시합격률이 증가하는가? 학교에서 알파걸이 늘어가고 있는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성적과 같이 객관적 기준이 작동하지 않는 다른 영역에서의 차별과 불평등을 반영한다. 여학생의 높은 학업성취도도 교육을 통해 구조적으로 불리한 지위를 보상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성공한 소수 여성에 대한 개별적 조사보다는 체계적인 차별시정과 일과 생활의 양립지원책 마련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하에 별다른 열의 없이 시작한 연구였으나, 나는 곧 유리천장을 깬 특별한 여성들이 주는 매력에 빠져들었다. 기업조직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이 1/n로 남지 않고 그보다 훨씬 크게 확장되어 사회로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이러한 집합적 학습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이들은 자신의 삶을 연구자에게 가감 없이 열어 보여주는 데 전혀 주저치 않았다.

여성 리더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사실은 그들 역시 일하는 여성 모두가 겪는 딜레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직장을 그만두고자 하는 결정이나, 심한 자책감으로 우울증을 경험한 여성리더들의 사례는 기업조직에서 리더의 지위에 오르는 일과 자녀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자 하는 상충되는 목표가 이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높은 수준의 보상을 제공하는 기업조직의 고위직이 요구하는 절대적인 시간과 노력의 총량으로 인해 여성리더들은 대부분의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의 부담을 제3자에게 아웃소싱 할 수 밖에 없다. 이 제3자에는 이제 일가친척, 혹은 내국인 가사도우미를 넘어 해외에서 경제활동을 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여성 이주노동력까지 포함된다.

여성의 관리직과 전문직 진출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미국과 일부 보육기반이 취약한 유럽국가의 경우 이제 제3세계의 여성 이주노동력을 보모와 가사도우미로 활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미국의 사회비평가 에렌레이히와 사회학자 혹스차일드는 2002년 발표한 책 『글로벌 우먼(Global Woman)』에서 선진국이 발전도상국으로부터 소중한 엄마의 “사랑”을 추출해 오는 이 비극적 현상을 제1세계 페미니스트의 곤혹스러운 눈으로 해석한 바 있다. 여성의 성공에 다른 여성의 희생이나 저임금 일자리가 수반된다는 현실이 더 많은 여성리더의 배출이 필요하다는 당위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이화여대로 직장을 옮긴 후 나는 뛰어난 후배 제자들로부터 미래 글로벌 여성리더의 모습을 보는 기쁨을 얻었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라면 이러한 현실에 보다 깊이 고민하리라 믿는다. 여성 이주노동자와 같이 거의 최하위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노동시장에서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더 나은 삶을 누릴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내가 여성 리더들을 통해 발견한 21세기 리더십의 핵심은 배려가 있는 열정으로 남을 도와 그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집단적 재능(collective genius)의 총 크기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화를 거쳐 간 글로벌 우먼은 그들의 영광과 성취 뒤에 묵묵히 일하고 있는 또 다른 글로벌 우먼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이주희 교수(사회학 전공) j.lee@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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