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JP’,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씨의 이니셜이 마드리드 텔레포니카 빌딩 창문에 크게 나붙었다. 빌딩 전시장에는 ‘백팔번뇌’, ‘TV부처’ 등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씨 의 작품 86점이 전시됐다. 백씨가 세상을 떠난 지 일년 만인 2007년 2월13일(금).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환상적이고 하이퍼리얼한 백남준의 한국비전展’가 열렸다.

이날 미술관과 기업 등이 소장하고 있던 백남준씨의 작품들이 스페인 예술계에 소개되기 까지, 전시기획자 김홍희(불문·70년 졸)씨의 노력이 있었다. ‘백남준 전문가’인 그를 1월9일(금) 광화문에서 만났다.

△백남준씨와의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   
김홍희씨는 나이 서른, 백남준씨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1980년의 어느 날, 뉴욕 맨해튼 남부 첼시 타운의 실험예술공연 센터 ‘키친(Kitchen)’. 창고를 개조한 작은 공간에서 백남준씨가 LP판을 내던지고 있었다. 둔탁한 빛의 파편이 튀어 올랐다. 백씨의 손에 들려있던 바이올린은 어느새 산산조각이 났다.

“너무 감동 받은 나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백남준 선생이 던져 깨뜨린 전축판과 바이올린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다 주웠어요.” 백남준 식 아방가르드가 태동할 때, 미술기획가로서 김홍희씨의 생명도 움텄다.

그가 페미니스트 전시기획가로서 정체성을 갖게된 데는 백남준씨의 영향이 컸다. 백남준씨와의 만남을 지속해온 그는 백씨의 진취적인 성향에서 페미니즘을 알아갔다. “백 선생은 당시 가정주부였던 제게 격려를 해줬죠. 그에게는 여성에 대한 비차별적이고, 편견 없는 이해가 있었다고 봐요. 그와의 교류는 페미니즘과의 연결고리가 됐어요.”

뉴욕에서 백남준씨와 맺은 운명적인 인연은 한국에서도 계속됐다. 1984년 백씨의 야심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한국에 소개될 때, 그의 남편 천호선(66·現쌈지길 대표)씨가 숨은 공신 역할을 했다. 백씨가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1990년대, 무명으로 귀국한 김홍희씨는 백씨의 제안으로 1992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뉴욕 심포지엄’에 발표자로 참가했다.

백남준씨와의 만남은 김홍희씨의 예술적 행보에도 큰 의미가 있다. 김홍희씨는 1993년에는 백씨가 창립멤버로 참여한 헤프닝(happening) 단체 ‘플럭서스(Fluxus)’를 한국에 소개했다. 플럭서스는 ‘김홍희’라는 이름과 함께 예술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한국에서는 백남준 선생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때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분야에 뛰어들었기에 지금 저를 찾는 분이 많은 거죠.” 
그는 백남준이 기획한 전시 ‘인포아트(InfoART)’의 큐레이터로 1995년 광주 비엔날레에 참가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생소한 인터렉티브 멀티미디어 아트(Interactive multimedia art) 전시로 화단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관객이 스크린 앞에 놓인 화분을 만지면 스크린의 잎사귀가 자라났다. 그는 아직도 ‘인포아트’를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로 꼽는다.

△미술계 늦깍이,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          
명성에 비해 그의 경력은 짧다. 김홍희씨는 40대에 활동을 시작했다.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해  꽃다운 20대를 ‘청와대 공무원 천호선의 아내’로 보냈다. 

반전은 그의 나이 서른 살, 뉴욕에서 일어났다. 1979년 4월 문정관으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 간 뉴욕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저는 잭슨 폴록, 앤디워홀 같은 당시 현대미술 작가들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얼마나 무지한 지를 깨달았죠. 그래서 미술사를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마냥 편하게 공부한 것은 아니다. 남편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석사만 10년을 했다.

그가 좌절할 때마다 남편 천호선씨가 그를 격려했다. 천씨는 아방가르드 예술을 국내에 들여오는 역할은 단연 김홍희씨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는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해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비평가가 전무했다. “부인에게 계속 부추겼어요. ‘당신밖에 이 공부 할 사람이 없다’고.” 천씨는 그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남편의 외조가 있었지만 살림과 공부를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주말이면 외교관 부인으로 파티까지 해야 했다. 부엌 식탁이 그의 책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전 아이들 유치원 다닐 때 공부를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성장하는 시기에 나도 성장했죠. 아이 둘이 다 큰 지금 내 일에 ‘올인’ 해요.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장거리를 뛸 수 있는 거죠.”

시작이 남들보다 한 박자 늦었던 김홍희씨. 대신 그는 남들보다 한 발 앞선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조정희 기자 jeojh0502@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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