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5월31일,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가 서울 정동의 자택에서 학생 1명에게 수업을 개시한 후로 123년의 길을 걸어온 이화여대. 그동안 이화를 거쳐 간 문인(文人)만도 200명이 넘는다. 일제치하의 1930년대부터 1980년대 민주화운동까지, 그 시절 속 이화의 이야기를 문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본다.

△일제탄압에 조용한 저항 펼친 1930∼40년대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 총독부는 이화여전을 몹시 경계했다. 적대국인 미국의 선교사가 창립한 학교인데다 당시의 교수진도 미국 유학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화에 대한 일본의 탄압은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강행됐다. 당시 이화인들이 탄압을 견뎌내던 풍경은 시인 이봉순(문과·40년 졸)씨의 수필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다음은 이씨의 「속사람 기르기」 중 한 단락이다.

하루아침에 영어만 제외하고는 모든 강의를 일본어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 바람에 사회학개론을 가르치던 한치진 박사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평소에도 약간 말을 더듬던 분이 서툰 일어로 강의를 하려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발음이 틀리면 학생들이 고쳐 드리면서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는데 하루는 이 어른이 강의 도중에 꽉 막히셨다. 시간이 흐르자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단 한 문단에 식민지 시절의 설움이 절절이 서려있다. 이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젊음을 한창 꽃피워야 할 시기에 그저 참고 또 참으면서 속사람 기르는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화에 대한 일본의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일본 총독부는 1944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여자연성소로, 또 1년 뒤에는 경성여자전문학교(경성여전)로 이름을 고치게 했다. 1945년 4월에 시작한 경성여전은 그 해 8월15일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4개월 반 동안 존재했다.
1945년 4월1일 경성여전에 입학한 번역가 나영균(영문·49년 졸)씨는 수필 「말없는 저항의 메시지」에서 당시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아름다운 학교 건물들은 그러나 대부분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었다. 본관을 제외한 모든 건물에는 군인들이 우글거리고 도처에 방화수가 든 드럼통과 모래주머니가 참호처럼 쌓여 있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초소가 설치되어 있고 우리는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보초병에게 경례를 해야 했다.

학문을 위해 대학에 들어선 ‘신여성’들에게 제일 먼저 요구된 일은 ‘일본군에 대한 경례’였다. 나씨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절이 대수로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볼품도 없어 보이는 녀석들에게 경례하는 것이 한없이 분하고 억울했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경성여전에서도 저항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경기여고를 졸업한 내가 이화에 와서 가장 신기하게 느낀 것은 선생님들의 근로 봉사에 대한 나태한 태도였다. 경기여고는 공립학교이기 때문에 일본 정책을 매우 충실하게 시행했다. (중략) 그러나 이화에 와 보니 여기는 딴 세상이었다.

나씨는 일제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는 공립학교를 다녔고, 일본 정책 수행에 ‘고의적으로’ 나태한 경성여전의 학풍에 놀랐던 것이다.

이화, 즉 경성여전에서도 근로 봉사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시키는 학교 측은 전혀 그 일에 대해 성의가 없어 보였다. (중략) 본관과 기숙사 사이에 있는 언덕 측면에 방공호를 파는 일과 뒷마당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는 일이었다. (중략) 두어 차례 줄줄이 달려나오는 감자를 보고 기성을 지르고 나면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나무그늘로 기어들었다. 선생님은 그러나 나무라는 기색도 없이 학생들과 함께 앉아 웃고만 있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일본말도 가관이었다. 이화의 선생님들은 마치 일본말 잘못하기 경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일본말을 왜곡시키고 학대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사람들 같았다.

부조리한 현실에 ‘조용한 웃음’ 또는 ‘일본말 왜곡 연구’로 대항하는 사람들. 나씨는 당시를 회고하며 “그들(일본)의 정책을 역으로 가는 것이었다”며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는 정책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어 그것을 쓰는 척하면서 오히려 일본어의 한국어화(韓國語化)를 도모하려는 듯한 기세였다”고 말했다.

△6·25전쟁의 상처 딛고 일어난 50년대


1950년 6월, 시인 권남지(국문·53년 졸)씨가 입학식을 치른 날로부터 보름 뒤 한국전쟁이 터졌다.
다음은 권씨의 수필 「6·25가 짓밟은 나의 대학 생활」 중 일부다.

사감 선생님의 흥분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흘러나왔다. (중략) “자 다 모였죠? 잘 들으세요. 지금 인민군들이 탱크를 몰고 의정부 쪽으로 해서 서울 시내 쪽으로 대거 몰려오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무조건 이 기숙사 문을 닫아야 하니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친척집이든 친구집이든 어디든지 빨리 가십시오. 빨리 해산! 해산!”
나는 아무 데도 갈 곳이라곤 없었다. 기가 막혔다. 갈 데가 없는데 빨리 가라니! 어디로 간다? 어디로?

입학하자마자 전쟁미아가 될 위기에 처한 권씨. 권씨는 다음 단락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활활 꿈에 부풀었던 대학 입학이란 하나의 화려한 풍선은 6·25로 인해 터지고 만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학교는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자동으로 휴교됐다. 그리고 1년 만에 부산시 부민동 산에 판잣집을 여러 채 짓고 다시 개교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화인들이 사라졌다. 

처음 입학했을 때 우리 국어국문과 학생은 분명히 55명이었다. 그런데 부산 판잣집에서 만난 급우는 달랑 열세 명이었다. 다들 죽었는지 살았는지 결혼은 했는지 아무 소식도 알지 못한 채 나머지 급우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열세 명만이 다시 만났다.

전쟁통에 살아남은 국어국문학과 학생 13명. 권씨는 이들의 학창시절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교실 바닥은 그냥 흙바닥이었는데 가마니를 쭉 깔고 책상도 없이 무릎에 책을 올려놓고 공부했다. 판잣집이라 여름에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덥고, 겨울에는 손이 시려 연필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중략) 그 때만 해도 쌀에 돌이 많아서 큰 양철자배기에 쌀을 씻어서 이는데, 밥 짓는 데 전혀 경험이 없는 우리 학생들이라 돌밥도 많이 먹어야 했다.

전쟁 중 우리 학교의 풍경은 시인 김양식(영문·54년 졸)씨의 수필 「서울/6·25/부산/다시 서울」에도 드러나 있다. 김씨는 당시의 학구열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런 맨바닥 교실에서 교수진의 부족으로 총장이시던 김활란 박사님도 영시 강의를 하셨고, 그 때만 해도 정열이 불꽃같던 모윤숙 선생님의 시문학 강의도 잊을 수 없다. 음악과에서는 역시 임원식 선생이 계셨고, 소프라노 김복희 선배의 화려한 오페라 ‘카르멘’ 공연은 그 피난지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로 피난이란 와중에서도 이화대학은 화려하게 부상되어 갔고 모두 그렇게 선망의 표적이 되었다.

남하한 지 2년 후인 1953년에야 전교생은 서울 본교로 복귀할 수 있었다. 평론가 허미자(국문·57년 졸)씨는 “전쟁으로 도서관도 만족스럽지 못했고 냉·난방은 생각지도 못했던 열악한 교육 환경이었지만, 교수님들의 정성어린 강의를 받을 수 있었던 우리들은 그때의 대학 생활을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라진 새마을 천막학교, 운동장…1960년대


문인들이 그리는 1960년대 학창시절 풍경 중 지금은 사라져버린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철로변에 자리해있던 새마을 천막학교와 본관 앞 운동장이다.
새마을 천막학교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교육봉사를 하기 위해 재학생들이 직접 마련한 공간이다. 다음은 수필가 홍애자(국문·60년 졸)씨의 「나의 꽃밭」 중 한 단락이다.

휴강 시간이면 ‘새마을 천막학교’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초등학교 교과 중에서 국어와 음악을 가르치면서 나의 가치관을 실현해 나갔다. 아이들의 천진한 눈망울을 보면서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씻겨 주고 머리도 깎아 주면서 차츰 그 애들의 밝은 모습을 대하는 즐거움이 커지기 시작했다.

대개가 부모를 잃고 어려운 환경에 놓인 아이들이었다. 구두를 닦고 껌을 팔며 살아가는 아이들은 ‘새마을 천막학교’에서만은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홍씨는 이곳에서 봉사하면서 학업에 지장을 겪기도 했다.

그 때 K교수의 기독교문학은 세 번 결석이면 학점이 나오지 않는 과목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시간이 지나 결강 세 번이 되었다. 교수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면서 어쩔 수 없이 천막학교 아이들에 대해 말씀을 드리게 되었다. 교수님은 내 두 손을 꼭 잡으시면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눈에 눈물을 글썽이셨다. 어느 누구보다도 어려운 이들을 살피는 교수님으로서 당신 과목 결강쯤은 문제가 되지 않아 하셨다.

그러나 학교의 모든 사람들이 K교수 같지만은 않았다. 홍씨의 글에 따르면 ‘어느 날, 학교 측으로부터 미관상 좋지 않으니 천막학교를 폐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두 학생만을 중학교에 입학시키고 천막학교는 철거되고 말았다.’
문인들이 꼽는 ‘사라진 1960년대의 풍경’ 중 다른 하나는 바로 ‘운동장’이다. 시조시인 이정자(기독교·66년 졸)씨는 「문리대 체육대회를 어찌 잊을까」에서 60년대 체육대회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그린다.

해마다 열리는 문리대 체육대회는 학생 교수가 다 함께 참가하는 큰 행사였다. 각 과마다 특징을 살린 응원이 최고 볼거리였다. (중략) 카드 섹션으로 사용될 준비물은 빨강·노랑·파랑·흰색으로 했다. 모자도 색깔별로 준비했다. 일단 화려하게 눈에 띄어야 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주어가며 응원했다.

이씨는 “그때는 동아리가 없었기에 학과를 중심으로 캠퍼스 행사가 이뤄졌다”며 “문리대 체육대회는 대학 시절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 추억”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작품이 ‘문리대 체육대회’를 담고 있다면 수필가 정부영(가정학·69년 졸)씨는 보다 규모가 큰 ‘이화 정기 체육대회’의 모습을 그렸다. 다음은 정씨의 수필 「마음 속 풍경」 중 일부다.

체육대회가 있던 날의 흥분과 소란스러움이 귀에 쟁쟁하다. (중략) ‘워싱턴 광장’이란 곡명에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란 동요를 대입시킨 응원가는 가장 잘 부르는 곡이었다. 응원가와 동작, 구호를 반복 연습하여 드디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서 함성을 만들어 내고 작은 몸짓은 자신감이 넘친 큰 동작으로 익혀 제대로 된 응원을 하게 되었을 때의 뿌듯함이라니…….

이씨는 “1960년대의 체육대회는 단합의 축제이자 젊음의 불꽃을 태우는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ECC(Ewha Campus Complex) 건축으로 2005년부터 본관 앞 운동장은 이제는 볼 수 없게 됐다.

△침묵의 민주화운동, 1970∼80년대


몸을 불사르고 거리로 뛰어나가는 것만이 투쟁일까. 당시의 이화인들이 군사정권에 반대해 택한 민주화투쟁의 방법은 조금 달랐다. 수필가 이예경(교육학·70년 졸)씨의 「검정 치마에 흰 블라우스 입고」를 살펴보자.

데모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다르게 운동을 벌였다. 모두 흰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를 입기로 한 것이다. 8천 명의 학생들이 모두 그 차림이었으니 교정의 아침 풍경이 볼 만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이대생들이 화려한 것은 사치스럽기 때문이라고들 했는데, 그 무채색의 옷차림은 우리를 수수하게 보이게 하기는커녕 더욱 청순한 배꽃 같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이예경씨는 본문에서 위의 상황에 대해 “이화인의 확실한 단합 정신을 보여 준 사건”이라고 말한다.
시인 안혜초(영문·64년 졸)씨의 수필 「정문 앞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에도 인상적인 일화가 담겨 있다.

“학생들을 잡아가려면 나를 먼저 잡아가라” 반독재 시위를 벌이며 ‘이화교’ 위에 빽빽이 모인 학생들 앞에 딱 버티고 선 김옥길 당시 총장께서 정문 밖에 집결한 전경들을 향해 호통을 치셨다는 그 한 마디와, 1965년 ‘한일 굴욕 외교 절대 반대’를 부르짖으며 학생들이 물밀듯 떼 지어 학교 정문을 나서려 하자 “너희들 정히 이 문을 나서려거든 내 몸부터 먼저 밟고 나가라” 호소하며 학생들을 보호하셨다.

정의를 추구하는 학생들과 그들을 보호하려던 김옥길 총장. 이들의 비극적인 충돌의 역사가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안씨는 “누구나 가슴에 뜨거운 불씨로 살아있을 70∼80년대의 일화”라며 “이 나라 여성교육의 효시가 됐던 이화의 개화신념·정신·얼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화인들의 가슴에도 아로새겨질 것”이라고 말했다.
 
최아란 기자 sessky@ewhain.net
사진제공: 이화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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