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여성 최초 국내 박사

“음식을 연구하는 것은 곧 사람을 연구하는 거예요.”

이애란(식품영양학 박사·09년 졸)씨는 북한 식량에 대한 연구가 곧 북한 사람에 대한 연구라고 믿는다. 우리 학교 대학원에서 7년간 식품영양학을 공부해온 이씨. 그는 2003년 7월 ‘남한거주 북한이탈 주민의 식생활 행동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탈북여성 가운데 처음으로 석사학위를, 지난달에는 ‘1990년 전후 북한주민의 식생활 변화’라는 논문으로 탈북 여성 최초 국내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8월16일, 당시 33살이었던 이씨는 갓 100일이었던 아들을 안고 친정식구 9명과 함께 압록강 건너기를 시도했다. 발각당하면 다시 끌려가느니 죽겠다는 각오로 쥐약 네 봉을 가슴에 품은 채였다. 같은 해 10월, 중국과 베트남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평양 출생이지만 월남한 조부모 탓에 북한에서 ‘월남 가족’으로 낙인 찍혔다. 11세 때 가족은 평양에서 오지로 쫓겨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식량배급에서 배제되는 것은 물론 취업, 학업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성적은 우수했지만 대학에 갈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해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과학기술 육성사업으로 신의주경공업대 식품발효학과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됐다. 졸업 후 과학기술위원회 품질감독원으로 자리를 잡은 그는 의사 남편과 결혼해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1990년 초, 미국으로 건너간 이씨의 친척이 ‘이씨의 아버지가 김일성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는 내용이 담긴 회고록을 출판했다. 그로 인해 그는 숙청 대상으로 몰렸고 결국 탈북을 결심했다. 계획이 탄로날까봐 남편한테도 알리지 못한 채 갓난 아들과 친정식구들만 데리고 국경을 넘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한국에서의 삶은 험난하기만 했다. 북한에서의 경력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30대 중반의 아줌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청소부에서부터 시작해 보험설계사까지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렇게 ‘낯선’ 한국에서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던 중 주위로부터 공부할 것을 권유받았다. 당시 우리 학교 식품 영양학과 이종미 교수의 도움으로 우리 학교 식품영양학과 대학원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원에서의 공부. 첫 수업부터 예상치 못한 장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영어를 배워본 적 없는 그에게 영어원서로 진행되는 수업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읽지를 못하니 봉사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귀가 안 들리니 귀머거리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말을 못하니 벙어리가 된 것 같은 심정이었죠.” 수업을 따라가려니 누워 자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씻을 시간조차 없었다. 입술에는 종기가 끊이지 않았고 이러다가 병이 들어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영어에 조금 익숙해지자 이번엔 ‘한국어’가 말썽이었다. “영어도 어렵지만 알고 보니 한국말이 더 어렵더군요.” 북한말에 익숙한 그에게 한국어는 영어만큼이나 낯선 말이었다.
요리실습시간. 그는 교수의 말을 엉뚱하게 이해하기 일쑤였다. “같은 설명을 들어도 내가 만들면 다른 요리가 돼있더라고요.” 한국어에 대한 장벽은 논문을 쓸 때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기본적인 소통도 안돼 고통스럽고 속상했어요.”

그는 이렇게 고통스런 순간들을 주변 사람들의 사랑으로 이겨냈다. 특히 이종미 지도교수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큰 힘이 됐다. 이 교수는 쌀을 살 때 항상 이씨의 쌀도 같이 샀다. 그리고는 ‘나에게 쌀을 갚고 싶거든 너보다 더 어려운 사람, 탈북자들에게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며 그에게 베풂의 정신을 심어줬다.
이씨는 공부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자신을 이겨내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렇게 이화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7년째 되는 해, 마침내 노력이 결실을 보았다.

지난달 23일(금), 이씨는 학사모를 머리에 썼다. “제게 이화에서의 7년간의 공부는 끊임없이 자신을 뛰어넘는 과정이었어요.”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온 그는 아직 자신이 박사라고 불리지 않았으면 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박사라는 타이틀에 규정 받지 않는 그대로의 ‘이애란’으로 살아가고 싶다. 앞으로 북한학과에서 의식주 생활문화를 가르치고 싶다는 이씨. 그는 앞으로 그 간 이웃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되돌려주는 삶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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