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여성이 목사안수를 처음 받은 것은 1955년이다. 큰 교세를 가진 대한예수교 장로회가 여성안수를 허용한 것은 채 20년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기독교 안에서 여성목사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다. 여성목사는 남성목사보다 임금이 적고, 맡겨지는 직무가 덜 중요하다.

현재 기독교 신자 중 약 70~80%는 여성이지만, 여성 목회자 비율은 5.37%이다. 여성목사 안수를 처음 허락한 감리교의 비율이 이러하니, 기독교 전체로 보면 그 수는 더욱 적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에서 양성평등을 달성하는 것은 다른 영역보다 더욱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사회나 직장, 가정보다 더  양성평등의 사각지대에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목회자·신도들이 믿는 하나님의 가치는 불변의 진리이기에, 그 진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곧 신에게 대적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결국,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기독교 안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여성 차별은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서 이뤄지는 남녀차별은 진리도, 하나님의 뜻도 아니다. 기독교의 남녀차별은 잘못된 인간의 자유의지가 불러낸 결과일 뿐이다.
신도들은 기독교의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적 문화 속에 오래 있으며 그 가치를 내면화한다. 내면화 과정에서 여성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가치에 순응한다. 이런 제도적 상황에서 여성들이 비판을 제기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여신도들과 여성 목사들은 기독교 안에서 양성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1908년 3월 8일, 1만 5천여 명의 미국 여성 섬유노동자들은 러트거스 광장에 모여 10시간 노동제와 작업환경 개선,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그날을 기념하는 것이 여성의 날(3월8일)이다.
여성들의 적극적으로 지위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등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여성의 지위는 100년 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격상된 여성 지위는 여성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이다.

기독교 내 남녀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성서 구절을 인용하곤 한다. 디모데전서에는 ‘여자는 조용히 순종하면서 배우십시오.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오늘날 성서의 반여성적 구절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입장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여성은 그것을 거부하고 다시 재해석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말했다. 양성평등을 달성하는데 성역은 없다. 하나님은 남·녀를 평등하게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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