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졸업 시즌이 다가왔다. 2005년 3월에 입학해 2009년 2월에 졸업하기까지 4년을 이화에 머물렀던 09년 졸업생들. 그들에게 ‘이화’하면 떠오르는 추억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화 채플
이화인이라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관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8학기 채플 과정. 졸업생 김하림(사생·09년졸)씨도 예외는 아니다.
“귀찮게만 생각했던 채플이 모두 제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것을 느꼈어요.”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그는 채플 때문에 아침 일찍 학교를 가야한다는 점이 가장 큰 불만이었다. 채플 내용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아예 딴 짓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채플 내용 하나하나가 그의 마음에 와 닿기 시작했다.
특히 한비야(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씨의 채플 강연은 그의 인생관을 바꿔 놓았다. ‘당신의 가슴을 가장 뛰게 하는 일을 하라’ 그는 사범대학 학생이지만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때, 한씨의 강연을 듣고 진로에 확신을 갖게 됐다.
 채플은 무용채플이나 합창채플같이 학생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이뤄지기도 한다. 황유나(영문·09년졸)씨는 그가 신입생이었던 2005학년도 2학기에 합창채플 무대에 섰다.
“합창 채플의 합창단은 음대 학생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학과도, 학번도 천차만별인 학생들이 모여 만든 채플합창단이더라고요.”
 홍씨는 한 학기동안 ‘교양합창’ 과목을 이수하며 대강당에서 5차례 합창 공연을 했다. 객석에 앉아 있을 때는 졸기 일쑤였던 그였지만 자신이 직접 채플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에 채플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부심도 가지게 됐다. 그는 “후배들이 채플에 직접 참여도 하면서 채플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며 채플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이화인 하나 되기 축구대회
“슛~ 골인!”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박선화(환경·09년졸)씨의 심장이 고동친다. ‘이화인 하나 되기 축구대회’는 그에겐 평생 잊지 못 할 추억으로 남았다.
박씨는 3년 연속 공과대학(공대) 대표로 운동장을 누볐다. 새내기 시절, 축구대회에 우연히 참가했다가 푹 빠져버린 것이다.
대회 시작 보름 전부터는 오전 8시면 시작되는 혹독한 훈련도 받았다. 체대에서 코치를 영입할 정도로 모든 팀원이 열의가 대단했다.
“아침 훈련이 힘들 법도 한데 그 시간이 대학생활 중에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이었어요.”
여자들끼리 하는 축구라 격렬하지 않으리란 예상은 금물이다. 다리에 멍이 드는 것은 예사고, 골절상을 당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함께 땀을 흘리다보면 저절로 서로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지더라고요.”
이화에서의 추억 중 축구대회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이정은(약학·09년졸)씨다.
“여대에서 축구대회라니,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죠.”
우승보다는 재미를 위해 참가한 축구대회에서 그는 1승이라는 쾌거를 거뒀다. 2차전에서 만난 유력한 우승후보인 법학대학 팀은 이씨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결과는 역시 패배였지만 그는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운동장을 뛰어다녔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승패에 상관없이 친구들과 즐겁게 운동장을 뛰어다닌 그 때를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때 그 시절, 함께 축구장을 누빈 그들은 우승보다 더욱 값진 것을 얻었다.

△ 대운동장과 강강술래
2005년 5월 20일(금) 대동제 폐막식에서 손을 맞잡은 이화인들이 대운동장에 둘러섰다. “고사리 대사리 껑-자. 나무 대사리 껑-자.” 손에 손 잡은 이화인들이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강강술래를 시작했다.
이재영(환경·09년졸)씨는 1학년 때 선배들 손에 이끌려 참여한 강강술래를 회상했다. “그게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여한 강강술래가 됐네요” 이씨는 “대운동장에서 이화인들이 축제를 끝내고 다같이 손잡고 강강술래를 했었다”며 “지금도 그때 만들었던 선배들과의 추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강술래는 당시 총학생회인 ‘이화드림’이 ‘이화인 모두 진정한 하나가 되자’는 취지로 처음 시행한 폐막식 프로그램이다. 그해 5월 ECC(Ewha Campus Complex) 공사가 시작된 후 대운동장이 없어져 2006년 대동제부터 강강술래를 시행하지 않게 됐다.
 
△ 이화사랑
전상희(사생·09년졸)씨는 새내기 시절 이화사랑의 빨간 소파에 앉는 것이 소원이었다. 점심·저녁시간이면 사람이 몰려들어 자리가 쉽사리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씨는 “처음 소파에 앉았던 날 친구들과 기념촬영까지 했다”며 “이제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두 소중한 추억”이라고 말했다.
박선화(환경·09년졸)씨가 처음 들어섰던 ‘이화사랑’은 진기한 풍경이었다. 박씨는 “김밥을 먹기 위해 통로에 길게 늘어선 학생들과 김밥을 만드는 주방이 한눈에 들어왔다”며 “이화사랑만의 분주한 공기가 무척 신선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탁은형(수교·09년졸)씨는 대학생활의 많은 시간을 이화사랑에서 보냈다. 탁씨는 이화사랑을 조별모임을 위한 모임장소나 친구들과의 담소를 위한 공간으로 애용해왔다. 탁씨는 “이화사랑은 단순한 카페가 아닌 이화인들의 수많은 추억이 깃든 장소”라며 “졸업 후에도 모교에 대한 사랑만큼 이화사랑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 ECC(Ewha Campus Complex)
“ECC가 조금 더 빨리 완공됐더라면 좋았을 텐데, 제대로 이용해 보지도 못하고 졸업을 하게 돼서 너무 아쉬워요.”
ECC가 완공된 지 한 해 만에 졸업을 하게 된 하혜정(무용·09년졸)씨는 ECC를 이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하씨가 입학한지 채 한 학기가 지나기도 전인 2005년 5월에 시작된 ECC 공사는 그가 졸업을 1년 남겨둔 2008년 2월에야 끝났기 때문이다.
김지영(사생·09년졸)씨도 서운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4년 중 절반 이상을 높은 벽과 천막으로 둘러 쌓인 ECC 공사장을 보며 학교를 다녔는데, 정작 완공된 ECC는 제대로 이용해 보지도 못하고 학교를 떠나려니 섭섭하네요.”
ECC 공사장 때문에 흙먼지도 많이 마시고, 길도 둘러다녀야 하는 불편함에 가끔은 심술도 났다는 김씨. 그는 정문 앞 운동장이 사라지고 ECC가 들어서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산 증인이다.
“서운하긴 하지만 운동장도, ECC도 모두 기억하는 이화인이 되어 뿌듯해요.” 지금은 지인들에게 ECC 자랑을 하는 ECC 팬이 되었다고.
“중도(중앙도서관)나 공대 건물까지 가려면 너무 힘들었는데, ECC 열람실 덕분에 1년 간은 정말 편하게 공부했어요.”
졸업 프로젝트 준비를 위해 학교에서 공부하는 일이 많았던 신선아(컴퓨터·09년졸)씨에게 ECC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정문 가까이에 접근성도 좋고 시설도 만족할 만한 ECC 열람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ECC 외관 덕에 캠퍼스도 한층 예뻐져서 너무 좋아요.” 그는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도 ECC로 인해 예뻐진 캠퍼스 풍경이 가끔 눈이 밟힐 것 같다고 했다. 

전은정 기자
정이슬 기자 iseul1114@ewhain.net
사진: 구희언 기자 whitecrow@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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