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미경(영문․ 82년 졸)씨 인터뷰

 

“소설은 운명처럼 느껴져요. 소설가들은 전부 결핍과 상실,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기에 글을 쓰는 법이지요. 저 역시 소설가가 안됐더라도 계속 뭔가를 쓰고 있었을 거예요”

광주민주화항쟁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 스무 살의 정미경(영문․ 82년 졸)씨는 하숙집 밥상머리에 앉아 눈물을 떨어뜨렸다. “애정 없는 밥상도 슬펐지만, 서울이 주는 두려움이 컸지요”

1978년, 갯벌냄새 자욱한 마산에서 상경한 정씨가 처음 접한 대도시의 풍경은 차가웠다. 지속적인 시위로 수업 일수도 부족했다. 그는 마음이 공허해질 때마다 기숙사 뒤 팔복동산에 누워 소설을 읽었다. 문학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그를 달랬다. 3학년이 되던 무렵 정씨는 생애 처음 단편 소설을 썼고, 그 작품이 이대학보사가 주관하는 ‘이화문학상’에 당선됐다. 이후 그는 글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리고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으로 등단했다. 그는 등단 후 작품 활동을 한참 쉬었다.

“글을 쓰지 않는 제 겉모습은 참 평안했어요. 하지만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인생이 무의미해지는 아쉬움이 항상 존재했지요”

그는 아이들을 키우며 글에 대한 열망을 다시 키워갔다. “등단하기 전까지 모든 작품들이 상을 받으면서, 일종의 자신감에 빠져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는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보내고 난 뒤부터 틈틈이 습작하다가 2001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비소 여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그때 시련이 찾아왔다. 아이를 키우면서 7년 간 써온 장편 2편과 단편 11편을 노트북 고장으로 한 순간에 날려버린 것이다. 다시 펜을 잡는 일은 힘들었다. 반지하 작업실에서 하루를 종일 노력해도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너무 허무해서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지요.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돈은 없는데 빚을 갚아야 하는 그런 상태가 되곤 했어요. 차라리 빚이라면 돌려막기라도 할 텐데 말이죠…” 그 허망함을 견디며 탄생시킨 작품이 바로 200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장밋빛 인생>이다. “8년이 지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원고를 분실한 일은 오히려 저를 치열하게 만든 각성제가 됐던 것 같아요”

정씨의 슬픔은 늘 작품으로 승화됐다. ‘부조리극의 무대처럼 아련하게 떠오르는 하숙방’은 그의 단편소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에 고스란히 담겼고, 인생의 커다란 고비에 부딪혔을 때 여행했던 노르웨이 오슬로는 2006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작품 <밤이여, 나뉘어라>의 배경이 됐다.

<밤이여, 나뉘어라>는 영화감독인 ‘나’가 노르웨이에 살고 있는 옛 친구 P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나’가 동경했던 천재적인 P가 파멸해가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에 대해 정씨는 “어둠도 아니고 빛도 아닌 백야가 계속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듯이, 삶에서도 꼭 월등하고 완벽한 것만이 바람직한 건 아니라는 것, 인생과 세계의 불완전함을 그리고 싶었다”는 수상 소감을 남겼다.

정씨는 열 번 넘게 퇴고하던 초기 작품들과 달리 최근 작품집 <내 아들의 연인>에서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특히 단편 <너를 사랑해>는 수동 카메라로 현실의 드라마를 찍듯이 거칠게 써보려고 했던 작품이다.

정씨는 현재 3개월 전 여행한 북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구상중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작가 까뮈의 집을 힘겹게 찾았다. 불우했던 까뮈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초라한 집이었다. “그곳 베란다에서 참새같이 앉아있는 아프리카 사람들과 해지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울컥했지요. 문학이 무엇이길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저를 그토록 힘들게 거기에 가게 했던걸까요?”

이제 그에게 있어 문학은 ‘나’라는 존재의 증명이자 세상을 보이게 하고, 비추기도 하는 반투명한 거울이다. “어떤 사건에 접하거나 음악을 듣는 매 순간 이것을 어떻게 문자화할지 고민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절대로 제가 소설과 분리되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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