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장애인의 대모 황연대(의학·63년 졸)씨 인터뷰

 

“나를 무시한 사람에게 이야기했어. 당신은 얼마 후면 장애인을 잊어버리겠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 땅 속에 묻혀도 ‘장애인’ 세 글자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1945년 봄, 8살의 황연대(의학·63년 졸)씨는 넘어질듯 절뚝거리며 초등학교 입학 면접장에 들어섰다. 그의 다리를 주시하던 일본인 교장은 흰 분필로 바닥에 선을 그었다. “거기서 여기까지 뛰어 봐라”

“3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서요…” 계속 뛰기를 강요하는 교장 앞에서 그는 울음을 터뜨렸고, 면접장에서 쫓겨났다.

“그때 처음 아버지께 맞아봤지. 아버지는 ‘내가 울었기 때문에 불합격한 것’이라며 나를 된통 혼냈어. 그리곤 꽉 껴안으시더니 ‘헬렌켈러’와 ‘루즈벨트’ 이야기를 들려주셨어” 그를 혼내던 아버지 안경 밑으로 눈물이 고였다. 그 모습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황씨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어린 황씨는 독을 품고 물었다. “아버지, 저도 헬렌켈러처럼 공부만 잘 하면 모든지 할 수 있어요?”


△ 장애인 재활치료 위해 불굴의 의지로 이화여대 의과대학 입학 

‘우리 집의 여왕’하며 딸을 아끼던 아버지 사랑으로 황씨는 치열하게 공부할 수 있었고, 대학입학시험 두 달 전, 그는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났다.

“이웃 학교의 문예반장이던 남학생이 나를 눈여겨봤다면서 불러냈어. 졸업 후 상이군인들을 위한 재활촌을 구상중인데 그 일을 도와달라며 의대나 약대에 진학하래. 난 문과였는데 말야”

갑작스러웠지만,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원서 마지막 날, 황씨는 남학생의 말대로 이대 의대에 진학해 장애인 치료·재활을 공부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의대 공부는 참 어려웠지만, 이화에서 평생의 스승이 될 김옥길 선생님을 만난 일은 큰 행운이지”

김옥길 전 총장의 수업을 듣기 위해 황씨는 의대에서 본관2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학생들은 우르르 내려오고, 손잡이를 놓치면 넘어지는데, 가방이 무거워 계단 하나를 오르기도 버거웠다. 몇 번 지각하자, 김 전 총장이 그를 불러 혼을 냈다. “혼내실 때까지 내가 소아마비 장애인이란걸 모르셨던 거야” 김 전 총장은 절뚝거리는 황씨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내가 다리 아픈 아이인 줄 모르고 야단 쳤던 그 일이 그렇게 가슴이 아프셨대. 4·19 통에 아버지께서 퇴직하시고, 내가 다음 학기 등록을 못했던 걸 아셨는지 교수님께서 내 등록금을 대신 내주셨어”

△ 의사직 포기하고 장애인 위해 정립회관 설립

1963년, 이대 부속병원에서 인턴을 마친 황씨는 세브란스병원 소아재활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며 어린 장애 환자들의 물리 치료를 돕기 시작했다.

같은 장애인이란 이유 때문이었는지, 황씨는 아이들과 금세 정이 들었다. 

“선생님, 진짜 의사 선생님이에요? 우리도 의사가 될 수 있는 거예요?” 황씨는 그동안 겪은 아픔을 아이들이 똑같이 겪을 일을 생각하며 밤마다 눈물로 일기를 썼다.

“게다가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어 얼마 후면 병원을 떠나야 했지. 그때 환자들이 만들었던 ‘황 선생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라는 설문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어. ‘같은 소아마비에 걸려는데도 28세까지 자살하지 않고 살아있는 당신을 보면서 우리가 희망을 가지는데, 그런 당신이 떠나면 어떡하느냐’” 

황씨는 밤새도록 울고, 유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장애인이면서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아이들에게 소개하기로 결심했다. 언론인이었던 아버지 친구분께 부탁해, 1965년 4월 병원에서 한국일보 주최 좌담회를 열었다.

“휠체어가 없어서 어떤 분은 업혀서 들어오시고… 장애인 판사·변호사·작가….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졌지”

이 좌담회를 기초로 1965년 ‘한국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가 설립됐다. 1975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영부인의 도움으로 정립회관을 세웠다. 황씨는 정립회관의 관장으로 양궁·수영·사격 등 장애인 체육 진흥을 위해 힘쓰는 한편, 장애인 사회 인식 개선·장애인 입시 문제를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장애를 가졌단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한 학생들을 위해 학교를 찾아다녔고, 장애아 학부모들도 직접 황씨를 찾아왔다. 의과대학장에게는 “선생님께서도 갑자기 팔이나 다리 못 쓰게 되면 의사 가운 벗을 거냐”며 항의하기도 했다. 장애인 입학을 금지한 대학은 그를 ‘황호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그는 더 이상 싸울 일도, 힘도 없어졌다. 그런 그에게 이번 베이징올림픽은 고난 후 맞는 달콤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의 이름을 딴 ‘황연대성취상’이 폐막식 정식 행사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황연대성취상’은 장애인올림픽에서 성적에 관계없이 불굴의 도전 정신을 가장 잘 실현한 남녀 선수 1명씩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1988년 ‘오늘의 여성상’을 받은 황씨가 ‘88서울장애인올림픽조직위원회’에 상금을 기탁해 시작됐다. 황연대성취상도 원활하게 진행되고 지금은 한 숨 돌리고 있다는 황씨. ‘황호랭이’는 어디 갔는지 부끄럽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외할머니다.

“이제는 여덟 살 때 내게 아픔을 줬던 일본인 교장·아버지·고등학교 때 만난 남편·감사하기만 한 이화의 교육…,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운명이었단 생각이 들어”      이채현 기자 cat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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