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를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이대학보’라는 이름을 달고 ‘이대학보’ 독자를 만나러 간다. 그러나 취재원의 마음속 이야기를 듣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슈’는 있지만, 이슈의 ‘당사자’를 만나기는 어렵다.

마치 빙산의 일각만 보일 뿐, 그 속의 빙산은 어떤 모양이며, 얼마나 큰지는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결국, 빙산의 일부분만을 파악한 채 기사를 쓰거나, 그 빙산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기사 쓰기를 포기한다.

민주주의 언론이 탄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요한네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판 인쇄술’의 발명이다. 그 이전에는 정보를 일부 귀족층·신학자들만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인쇄술 발명으로 인해 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일반 사람들도 원한다면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귀족의 소유물이었던 ‘정보’가 많은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가지지 못했던 것을 갖게 됐을 때는 기쁠 수밖에 없다. 아마 그 당시 민중들도 정보를 갖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고. 최대한 많은 정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글에 담아냈다. 몇몇 지식인들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법에 대해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반대했다.

이것이 민주주의 언론의 초기 모습이다. 언론은 이처럼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글을 읽고 싶은 사람들만의 것도 아니다. 두 대상의 상호보완적인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화 안의 언론을 책임지는 ‘이대학보’는 독자를 위해 존재해야 하지만 독자의 생각을 담아내지 못할 때가 자주 있다. 독자가 읽고 싶은 기사보다는 기자가 원하는 기사를 쓰게 된다. 독자들은 자신과 관련 없는 기사나 흥미를 끌 수 없는 기사는 자연스레 읽지 않게 된다.

그 이유를 기자들의 취재 부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행동을 중시했던 프랑스 언론인 볼테르는 “누군가가 너에게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찾아라”며 적극적인 취재를 권했다. 이화 안을 돌아다니며 기삿거리를 직접 찾기보다는 기자 개개인의 생각이나 경험에서 나오는 문제를 기사화한다는 점에서 내부의 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학보사 기자들과 이화인들과의 의사소통 부재다. 기자는 독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독자는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의견은 밖으로 표현됐을 때만 힘을 갖게 된다. 속으로 불만만 느끼고 ‘누군가 알아주겠지’라는 소극적인 태도는 언론의 발전을 위한 길은 아니다. 개개인이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때 그 의견 하나하나가 여론 일부를 형성하게 되고 기사는 여론을 바탕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가끔 취재를 하다 보면 ‘저도 그 일의 당사자지만 제가 말하기에는 좀 껄끄럽네요’라며 취재를 거부하는 취재원들을 만나면 씁쓸하다. 의견 표현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얻기까지 피 흘린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아무런 제약 없이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임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사상가 밀턴은 “진실과 거짓을 다투게 하라. 그러면 진실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자동 조정의 원리’로 설명된다. 진리는 사상의 시장에서 어떠한 옹호자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권력자의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화 안의 여론은 아직 ‘진실’과 ‘거짓’이 다투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대학보 기사가 진실을 담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진실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자는 진실을 말하는 독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진실’이라 믿는 것이라면 용기를 내어 큰 목소리를 내야한다. 이는 기자만 할 일도, 독자만 할 일도 아니라 이화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모두 해야 할 의무다.

신문은 독자가 없으면 죽은 매체다. 기자는 독자가 있어야 힘이 난다. 아직 이화의 언론은 말하고 싶은 것이 많고, 듣고 싶은 것이 많다. 독자들의 냉소적인 무관심보다 따끔한 일침과 따뜻한 조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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