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람 없는 상영관에서 영화 <샤인 어 라이트>를 보았다. 거장 감독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이 영화 <샤인 어 라이트> 는, 전설적인 락 밴드 롤링 스톤스의 공연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한 영화다. 이 영화는 롤링 스톤스의 공연 직전 벌어지는 준비과정은 물론, 그들의 공연실황과 퇴장까지의 모습을 장장 두 시간에 걸쳐 보여주고 있었다.

‘롤링 스톤스’ 라는 이름만으로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무시무시한 밴드는, 45년이라는 시간동안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것도 꾸준하게. 물론 중간에 멤버가 교체되고, 술과 약물 때문에 종종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롤링 스톤스는 지금까지 현존하는 록 밴드 중 최정상의 반열에 올라있다. 그들은 환갑이 넘는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여전히 무대 위에서만큼은 에너지가 넘친다. 이 할아버지들은 지금도 달라붙는 가죽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으며, 무대 곳곳을 누빈다. ‘연륜’ 이 묻어나는 얼굴 뒤에는 ‘열정’ 이라는 또 다른 표정이 숨어있다. 롤링 스톤스의 음악에 감화된 관객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인종에 상관없이, 그저 그들의 리듬을 따라 어깨를 들썩인다. 롤링 스톤스는 음악에서만큼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며, 또한 자유롭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밴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유인으로서 존재한다. 그들에게는 거대한 무대 위가 마치 자신들의 소우주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4명의 멤버는 그 무중력의 우주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는 행성들이다. 그들은 하나의 소우주로 존재하는 무대 위에서, 자그마치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반짝이는 별로 존재했다.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내 귓가에는 롤링 스톤스의 ‘Jumping Jack Flash’ 가 여전히 머물고 있었다. 팔팔한 움직임으로 무대 곳곳을 누비는 보컬 믹 재거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음악 안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그들의 모습은 뭐랄까,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의 모습 같기도 했고, 또한 일찌감치 세상을 알아버려 조로한 소년의 모습 같기도 했다. 그들은 예술이라는 것이 완결되어 높은 자리에 존재하는 어떤 경지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서로 섞이고 파이고 구르면서 찾아가는 젊은 정신의 도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이런 철없는 어른들의 모습이 참 멋져 보인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그 모든 것들이 익숙하게만 다가오는 어른들에게, 이 세상은 참 재미없는 곳일 거다. 그러나 아직까지 무대 위에서 딱 붙는 가죽바지를 입고, 자신의 음악이 금세기 최고의 음악이라 믿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어른이 아닌, 차라리 소년 같다. 당연시 하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 심지어 자신의 생물학적 나이마저 거스르려고 하는 그 할아버지들의 모습은, 결코 노인의 모습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육십이 넘은 할아버지가 “나는 만족할 수 없어!” ((I can’t get no) Satisfaction) 라고 외치는 그 모습을.

물론 모든 어른이 다 믹 재거 같을 수는 없다. 롤링 스톤스는 여타의 다른 어른들 중에서도 예외에 속한다. 그들은 행운아다.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록 음악을 40년 동안이나 계속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어느 누군들 믹 재거와 같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이렇게 환갑이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무대 위에서 방방 뛰고 있는 이 할아버지들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큰 위안을 얻는다. 이를테면 대리만족 같은 것을. 이런 어른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 세대의 어떤 풍요로운 기쁨을 준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생물학적 나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는 어리지만, 일찍이 조숙해서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은 것 마냥 행동하는 청년들의 모습에서는 노숙한 노인의 냄새가 난다. 요즈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목격한다. 삶의 어떤 무게를 진즉에 깨달은 이들은 이 세계를 낯익은 곳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거스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매일의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기계론적으로 돌아가는 사회, 선택하기를 강요당하는 삶, 그리고 인간이기에 지녀야 하는 숙명 속에서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이 부조리한 세계를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그저 영원하고 아름다운 저 너머의 세계를 꿈꾼 채, 익숙한 일상을 살아갈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이렇게 아름다운 저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권리도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다. 롤링 스톤스가 젊은 시절 그대로 달라붙는 옷을 입고 펄쩍펄쩍 뛰면서 여전히 젊은 노래를 부르듯이. 멋진 어른과 그저 그런 어른의 차이점은 다른 게 아니다. 각자의 소우주를 지키면서 사는 것과, 이 사회의 제도와 법칙에 끌려 다닌 채, 자신의 소우주를 잊고 사는 것. 딱 그 정도뿐이다. 멋진 어른은 다르게 하는 법을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의 소우주를 지키면서 사는 일도 힘에 부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꿈은 이렇게 나만의 소우주가 세계의 전부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철없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롤링 스톤스 할아버지들은 여전히 벽에 똥칠하는 그 날까지 무대 위에서 방방 뛰어다닐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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