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손가락을 한번씩만 꼽아도 내 나이를 셀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난 ‘난 결혼 안 할 꺼야’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었다. 어른들은 그저 어린애 장난이겠거니 하셨겠지만 난 사뭇 진지했었다. 결혼을 하지 않을 테니 아이도 없을 것이고, 외동이라 형제 자매도 없으니 난 소위 말하는 ‘골드 미스’가 되어야 한다는 굳은 결심까지 했었다.

 열 손가락을 접었다 펴고 다시 한번 접어야 내 나이를 셀 수 있게 된 어느 날. 좋아하는 미국 시트콤 속 여주인공이 예기치 않은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주인공은 임신 사실을 알고 뛸 듯이 기뻐했다. ‘나 이제 엄마가 되는 거야’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들도 방청객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결혼 후 출산’을 불변의 공식으로 알고 혼전 임신이 주는 충격과 공포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 사회에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한국에서와는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1년 여 동안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는 미혼모의 집 관계자에게 메일을 보내 물어보았다. 그 관계자가 보내준 긴 답변의 요지는, 미국 사회는 미혼모를 ‘결혼 전에 아이 낳은 여자’가 아닌 ‘엄마가 된 여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홀로 엄마가 되기를 결심한 여성을 보듬어 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 준다고 한다. 미혼모를 위한 직업교육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아이 아버지를 강제로 소환해 양육비를 부담하게끔 하여 양육비 부담도 덜어주려 한다고 했다. 미혼 가정도 삶의 한 방식으로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미혼모들은 오히려 더 당당하고 씩씩한 여성으로 비춰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1년 여 기간 동안 미혼모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한국 미혼모들이 쓴 자서전 격의 글들을 수없이 읽었다. 아이 아버지가 몰래 아이를 입양 보내버려 그 한을 한평생 속으로 삭히는 엄마, 아이를 호적에 올리려고 했지만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엄마의 이야기도 보았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상처받은 엄마들을 보듬어 주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미혼모는 엄마라기 보다, 그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낳은 ‘부정한 여자’일 뿐이었다.

실제로 임신 사실을 안 미혼모 중 8∼90%는 아이를 기르고 싶어한다고 한다. 하지만 상담 기관에서 상담을 마친 후에는 2∼30%만이 양육을 원한다고 한다. 미혼모 지원책이 부실할 뿐만 아니라 아이 아버지에게 양육비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강제되지 않아 금전적인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 양육 포기의 가장 큰 요인이다.

이에 따라 NGO 단체들은 정부 관계자에게 미혼모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부 측에서는 부정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정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미혼모 지원책이 확대되면 그에 비례에서 미혼 가정이 확대될 것이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와 이루어진 ‘정상 가정’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어느 틈엔가 미혼 가정은 비정상으로 분류되어 새어나가선 안되는 집안의 비밀이 되어버린 것이다.

미혼 가정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은 비단 정부 관계자 뿐 만이 아니다. 사실 금전적 어려움보다 더 큰 문제는 미혼모와 그 아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아이를 포기한 미혼모들은 아이를 기르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안는다. 매정하게 아이를 버린 비정한 엄마라는 주변의 손가락질은 생채기 난 마음을 한번 더 후벼 판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미혼모라 해서 상황이 크게 낫지는 않다.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보니 몸이 성할 리 없다. 꽃다운 나이에 받은 씻을 수 없는 배신의 기억 때문에 술과 담배에 절어 사는 미혼모들도 있다. ‘애 아빠는 왜 없어?’ 라는 호기심과 질타 섞인 말 때문에 겪는 혼란과 상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미혼모들은 ‘나를 무시하는 것은 내 아이를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라는 말로 한 맺힌 마음을 표한다. 아이를 포기하겠다는 것도, 아이를 기르겠다는 것도, 어느 것이든 그 결정은 어린 엄마의 마음을 짓누르게 된다. 철없는 한국 사회는 가뜩이나 상처받은 그들의 무거운 마음을 꾹 밟아 저 구석으로 몰아 넣는다.

텔레비전에서 추석 특집으로 국제결혼 가정의 일상을 그린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것을 보았다. 놀라운 것은 불과 2∼30년 전만 하더라도 국제결혼, 혼혈아에 대한 이유 없는 거부감이 팽배했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다문화 가정을 이해해야 한다며 TV 프로그램까지 만들 정도이니 그 변화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렇다면 다문화 가정을 받아들인 한국 사회의 포용력을 미혼 가정에까지 넓혀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험한 세상에, 의지 하나만으로 아이를 키우겠다고 결심한 엄마의 용기가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어떻게 자기 아이를 버려, 모진 말을 내뱉기 전에 아이를 포기해야만 했던 엄마의 애닯은 심정을 헤아려 줄 수도 있지 않은가.

거창한 구호를 외칠 필요는 없다. 우리 눈에 조금 덜 익숙한 것일 뿐, 그들 역시 자신들의 삶을 묵묵히, 때로는 안간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너그러이 봐줄 수 만 있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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