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길을 잃었다. 정확히 말하면 3층 820번대로 시작하는 영미문학 서가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고는, 내 선택만을 기다리는 우울한 낯빛의 책들이 전부였다. 평소 영미문학을 즐겨 읽지 않은 탓인지, 읽을 수 없는 원서들이 가득한 그 곳의 분위기에 압도되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매번 그 쪽만 가면 길을 잃는다. 그 날도 여지없이 나는 820번대의 서가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그 때 리차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책을 찾고 있었다.『미국의 송어낚시』를 10분간 찾아 헤매다, 결국 찾지 못한 나는 정말 '송어낚시' 라도 하는 심정으로 알파벳 A에서부터 찬찬히 책 제목만 읽어나가기로 했다. 누군가의 선택을 한동안 받지 못한 탓인지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책들과, 자주 선택되는 탓인지 테이프를 여러 겹 감고도 헤져버린 책들을 살펴나가다가, 우연치 않게 양장본만 20권정도 되는 폴 오스터의 전집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폴 오스터의 전집을 지나쳐 제인 오스틴 전집에 눈길이 갔을 무렵, 철퍼덕 바닥에 떨어져 있는 폴 오스터의 『빵 굽는 타자기』란 책이 눈에 띄었다. 나는 가만히 책꽂이에 꽂아둘까 하다가 그러기에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슬슬 그 책을 넘겨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게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라는 그 눅눅한 문장들을. 『빵 굽는 타자기』는 폴 오스터의 자전소설이다. 지금이야 전 세계적으로 그가 팔아치운 책만으로도 성을 쌓을 수 있다지만, 그 역시도 소설가가 되기 전 생계와 소설과의 갈림길에서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 책은, 글 쓰는 것 말고는 그 어떤 일도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후, 필연적으로 그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생계’와의 치열한 투쟁을 담은 기록이었다. 그 두 문장을 읽고, 나는 왜 도서관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들이 우울한 낯빛을 지니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수많은 책들은, 독자의 선택을 받기 전까지는 책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단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하찮은 것들에 불과한 것이었다. 참으로 가혹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채 200쪽이 되지 않는 그의 자전소설을 모조리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어딘가 에서는 출발해야 한다. 원하는 만큼 빠르게 전진하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그래도 나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두 발을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지만, 아직은 달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 라고 자신의 젊은 날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폴 오스터를 만날 수 있었다.
  그건 폴 오스터의 문장이 아니라 내 문장이었다. 딱 소설 속 폴 오스터의 나이인 나는, 내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안개와도 같이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때때로 나는 길을 잃기도 했으며, 내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이 세상의 어디쯤인지 알지 못했다. 그 언제든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나는, 다만 생존이라는 지겨움 앞에서도 목숨처럼 지키고 싶은 나만의 투쟁방식을 지니고 싶었다. 이를테면 두 발을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려 했던 청년 시절의 폴 오스터처럼. 그의 말처럼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헐값에 팔아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그건 어느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나는 꼭 찾아야 될 책이 아니면, 굳이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 하지 않는다. 그냥 무작정 830번 대의 한국문학 서가를, 100번 대의 철학 서가를, 200번 대의 정기간행물 서가를 찾아간다. 그 곳에서 때때로 길을 잃기도 하며, 그러다가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온다. 가령 이런 식이다. 안톤 체홉의 희곡집을 찾으러 갔다가 마야코프스키의 격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를 만나고, 오디세이아를 찾으러 갔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읽을 책을 찾아 도서관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 그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기  위해 나는 도서관을 찾는다. 그렇게 알게 된 수많은 책들의 모양새는, 꼭 지금의 모호한 청춘을 겪고 있는 나의 모습이기도 했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유년시절이기도 했으며, 혹은 알 수 없기에 더 아름다운 나의 미래이기도 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주변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때로는 몇 개의 단어와 조사로 이루어진 단 한 문장이, 우리의 삶을 놀랍도록 잘 대변해줄 때가 있다. 작은 책 한 권으로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인 것이다.
  오늘도 도서관에는 당신의 선택만을 기다리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워 보이는 것은, 독자들의 선택을 간절히 기다리는 우울한 낯빛의 책들이다. 도서관에서 길을 잃어 새롭게 당신과 조우하게 될 그 책은, 어쩌면 작가의 책이 아닌, 당신만의 고유한 책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도서관에서 길을 잃으며 만났던 많은 책들의 첫 문장을 곧 보게 될 당신이 뜨겁게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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