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을 내려 많은 아이들이 몰려가고 있었다. 소양은 떠밀리듯 그들 속에 섞였다. 교문에서 학관으로 걸어 들어가자 사루비아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고 표현할 만큼 강렬했나 보다. …(중략)… “그래서 휴학했단다, 그게 이유야.” 『숲속의 방』 중


『숲속의 방』, 『미불』, 『내 안의 깊은 계단』 등을 쓴 소설가 강석경(조소·74년 졸) 선배. 보고 싶은 연극이 있어서 거주지인 경주에서 마침 서울에 올라온 그를 운좋게 만났다. 책표지 사진으로 본 것처럼 깊은 눈빛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읽은 『숲속의 방』 때문에 4년 내내 등록금을 내러 십자로를 지날 때마다 휴학을 할까 망설였노라 고백하여 인터뷰를 시작했다. 알고보니 그도 소양처럼, 난데없는 휴학을 한 적이 있었다. 이십대 초반, 이화여대 조소과 4학년에 재학 중일 때였다. 그는 휴학을 한 뒤 광고대행사에서 일해 보기도 하고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그는 그 때 등록금을 내지 않은 이유에 대해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다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평온한 일상에 난데없이 던져진 ‘왜?’라는 질문,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예술가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일상이 껄끄럽게 느껴질 때 소설가는 펜을, 미술가는 붓을 든다. 답을 찾기 위해서다. 어려서부터 내면적인 성향이 강했던 강석경 선배는 늘 보다 근원적인 답, 본질에 대한 답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자신과 사회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자연스럽게 펜을 들었다.


이렇게 쓴 글로 대학 재학 시절 ‘이대학보사 추계문예’에 「빨간 넥타이」로 당선되기도 했다. 작품의 내용은 이렇다. 빨간 넥타이를 좋아하는 한 사내가 사회에 편입되면서 직장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성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빨간 넥타이를 매지 못하게 된다. 파란 넥타이만 매던 사내는 우연한 기회로 빨간 넥타이를 다시 맬 기회를 얻고 잊고 있던 정체성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강 선배는 졸업한 뒤 은행에서 일할 기회도 있었고 잡지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 선배가 결국 찾아낸 ‘빨간 넥타이’는 바로 소설이었다. 본질에 대한 탐구심을 외면할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령 명예교수의 추천으로 『문학사상』에 「근(根)」과 「오픈게임」으로 제1회 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소설의 길을 선택했다고 해도 그 길을 걷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가끔 소설 쓰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내가 왜 예술을 하게 되었나, 후회가 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요. 본질을 찾고자 하는 갈증을 외면할 수 없으니까요.”


가시밭길 같지만 그 길을 외면할 수도 없는 예술가의 운명은 강 선배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천착하게 하였다. 그는 『미불』, 『내 안의 깊은 계단』 등의 장편소설을 통해 그 질문에 답하고자 노력해왔다. 『미불』의 주인공인 칠순의 나이에도 몸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에로티즘을 추구하는 노화가이다. 본질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세상의 규약도 노화가에는 중요하지 않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해 강 선배는 다시 ‘본질’이라는 말로 돌아간 것이다. 인생의 본질을 찾기 위해 작업을 통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게 강 선배가 얻은 답이었다.


간혹 문화생활에 대한 욕구를 조금이나마 채우러 서울에 온다는 그는 현재 경주에 살고 있다. 경주는 그의 마음의 고향이자 창작의 원천인 곳이다. “경주는 임금들은 거대한 무덤과 사람들이 활보하는 도로를 함께 밟을 수 있는 곳이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근원적 공간이예요.”


그런 경주가 영감을 준 덕분인지 경주에 온 뒤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스스로 ‘과작형 작가’라고 말하는 그가 20년 동안 서울에 쓴 작품과 10년동안 경주에서 쓴 작품량이 비슷할 정도이다. 유물 발굴하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썼다는 『내 안의 깊은 계단』도 경주에서 살면서 쓴 작품이다. 그는 “지나친 서울 중심의,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이 우리가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이화인들에게 “소설이 많이 읽는 봄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전했다. 문학은 우리의 인생과 밀접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우리의 고민들에 대한 답을 찾는 여러 길을 터주기 때문이다. 당장은 필요없는 듯 보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맞닥치게 되는 인생의 고민들에 대한 답을 말이다.


이제 곧 이화의 교정 곳곳에 봄꽃이 피어날 것이다. 학관 앞 십자로에는 어김없이 붉은 사루비아가 심겨질 것이다. 그 사이를 걸어다니는 이화인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이 봄을 보낼까. 너무 쉽게 다가와 버린 중간고사에 대한 생각일 수도 있고, 취업걱정일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본질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본질’이라는 말이 조금은 추상적이고 고루한 단어처럼 들릴지 몰라도 사실 그 단어는 멀리 있지 않다. 문득 길을 걷다가 세상이 낯설어 걸음을 멈추는 그 순간, 우리의 질문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김강지숙 객원기자 12361215@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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