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은 아름답다. 우리가 사랑하는 서울, 그곳의 심장부, 시청 앞 광장에서, 때는 2008년 4월 27일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로 5천여 명의 중국 유학생들은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그곳은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가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었고, 그날은 중국의 티베트탄압 사태를 비판하는 한국인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화봉송’이라는 민족적 이름하에 똘똘 뭉친 중국인 유학생들은 ‘중국 만세’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오성홍기를 두른 중국인들의 붉은 대열은 마치 곧 서울을, 한국을 점령할 태세라도 갖춘 듯 무서울 정도로 광기어린 모습으로 변질돼 있었다. 그리고 곧 ‘폭력’으로 분출됐다. 보도블럭·쇠뭉치·깃대 등의 온갖 것을 한국시위대에게 던졌고, 한국인은 머리가 찢기는 부상까지 입었다. 국보 1호가 불에 타며 같이 타들어갔던 가슴이 채 아물기도 전에, 대한민국의 심장부에서 다시 한 번 자존심에 대못이 박힌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청에서 우리 민족이, ‘중국’의 오만함으로  점철된 집단 폭력을 받은 것이다. 민족적 자존심에 칼이 꽂히는 순간이었다. 


이 사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 정부의 대응이었다. ‘현장에 있던 중국인들은 선량한 중국인들이었으며 본의가 좋은 것이었고, 성화 릴레이를 방해하려는 티베트 분리 지지자들의 행동을 저지하려는 정의의 행동이었으나 다소 과격해진 것이 사태의 본질’이라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응방식은 사건 발생 자체보다 과히 충격적이었다. 여태껏 우리에게 ‘중국’이라는 나라는 그저 싼값으로 여행할 수 있는 저렴한 관광 국가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다른 국가에서 그들의 국민이 저지른 폭력행위에 대해 저와 같은 발언을 했다는 것은 단순히 굴욕감뿐만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 우리에게 방망이질 한다. 그것은 중국이 ‘강대국’으로의 발돋움을 했다는 것이다. 어느새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 우리는 껴있었다. 지정학적 위치상으로라도 이젠 국가의 힘을 기르지 않으면 자칫 퇴보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한 번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해방 후 전쟁의 폐허가 된 대한민국은, 5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국민 총생산의 10%나 차지하는 미국의 구호물자에 전적으로 의지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의지해가며 일어섰고, 80년대까지 산업화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 결과 21세기를 맞은 오늘날, 이제 전략적 동맹을 할 정도의 온전한 힘을 갖춘 듯했고, 이제 협력과 경쟁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국가력을 성장시키고 모두가 꿈꿔왔던 선진국으로 발돋움을 할 때가 온 듯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시점에서 요즘 우리사회를 볼 때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안타깝다. 국민의 동의를 얻는 기본적인 절차조차 밟지 않은 정부는 비판받아 마땅하고, 동시에 한 국가의 국민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절대다수가 그래도 믿어야하는 한 인간을 파렴치한 국가살인자로 모는 군중심리의 그 내면 또한 궁금해진다.


소 때문에 모인 집회임이 분명할텐데 어딘가에 내걸린 반미에 대한 표어들과, 쓰레기 만두며 우지파동으로 국민을 오도했던 그 방송이 내놓은 ‘한국인 유전자 특질론’에 대해선 왜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어떤 게 유언비어인지도 모르는 인터넷 상의 유언비어들. 이중에 만약 실체가 없는 근거가 있다면,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냄비’가 뜨거워진다면 이것은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아닐까. 실체 없는 근거를 정부가 가진 진실적, 궁극적 문제점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우리가 닥친 문제를 가장 이성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8일에는 급기야 ‘부시에 당당한 김정일이 낫다’라는 고등학생의 발언이 기사화 됐다. 미래를 짊어질 고등학생들이, 자기 국민을 굶주림·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람을 편들도록 만든 것은 누구인가. 결국은 국민을 위해 무엇이 먼저인지, 국민 스스로도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다.

임은원(국문·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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