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는 몸살을 앓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사이클론의 피해자가 250만명에 달하며, 3일전 중국에서는 리히터 7.8규모의 강진이 발생하여 만명이 넘는 이들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갔다. 그렇다면 한국은 그에 비해 평화로운가. 그렇지도 않다. 미국 쇠고기 수입 결정에 따른 광우병에 대한 우려, AI의 전국적 확산, 온갖 흉악 범죄의 난무 등으로 인한 전국민적인 불안이 한반도를 감싸고 있다.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세계 곳곳을 강타하고 있다.


나는 재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재난 자체를 즐기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내가 재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재난과의 대결에서 대부분의 인간이 승리를 거두기 때문이다. 숱한 재난 영화들 중 내게 가장 인상깊은 재난영화는 볼프강 페터슨 감독의 영화 ‘포세이돈’이다. 나는 인간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부딪혔을 때 겪게 되는 인간의 고뇌와 실존적인 선택, 그리고 승리의 과정을 사랑한다. 바다라는 거대한 존재와 마주한 인간들의 유기적인 연대와 그 속에서 발생하는 의미있는 죽음-어쩔 수 없이 죽음이 다가왔을 때 다른 인간들이라도 끝까지 살려주려는 몸부림-이 참으로 절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번 중국의 지진사태에서도 사람들의 유기적 연대는 빛을 발하고 있다.


한국일보의 5.15일자 기사에서는 중국 쓰촨성 지진당시 샹어중학교 1학년 여학생 샤우슈에와 샤우야의 ‘죽음의 문턱에서 나눈 우정’을 다룬 바 있다. 그들은 갑자기 건물 잔해에 깔리게 되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연대했다.  그나마 상태가 나았던 샤우슈에는 머리를 다친 친구 샤우야의 손을 꼭잡고 하나의 마음이 되었다. 샤우야역시 “살아서 함께 나가자”라고 삶의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조대가 왔을 때는 상황이 악화되어 샤우야는 안타깝게 죽고 말았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순간 둘의 연대가 없었더라면 둘다 살아남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살아남은 샤우슈에는 평생 그 순간 나눈 우정과 인간애를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중국 지진 현장에서는 계속적으로 매몰자를 구조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 수록 생존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살려야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현장에 매몰된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재난을 헤쳐나가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미얀마, 중국의 사태와 같은 자연적인 재해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힘을 연상케한다. 그러한 재해는 사회적 대혼란을 유발하게 되어 인간에게 절망을 가져온다. 우리에게도 어느날 갑작스레 절망이 다가올 지 모른다. 물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사회 혼란 속에서는 인간이 감정적이 되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을 갖고 대처하기가 힘들다. 구체적인 대안 마련에 앞서서 무엇보다도 인간들끼리 연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실존적 연대’, 그것이 바로 휴머니즘의 핵심이며 현시점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연대의 일환으로 중국 지진지역에 구조인원, 의료인 급파 및 미화 100만달러의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우리의 지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중국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지진 기사에 악플을?달았던 것이 그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한 평소 감정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자연재해로부터 비롯된 비극적인 기사에 대해서 비아냥거리거나 악플을 다는 행위는 옳지 않다. 무고하게 죽어간 목숨들 앞에서 감정을 앞세우는 행위는 우리에게도 독이 될 수 있다. 진정한 휴머니즘을 찾는 길은 그렇게 거창한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을 위한, 그리고 우리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댓글 하나로부터 휴머니즘은 시작된다.

 

우경진(철학 ·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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