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예(영문·83년졸) 작가가 3년 만에 신작 『붉은 비단보』(이룸)를 냈다. 고전적인 느낌의 붉은 책표지는 기존의 작가가 그려나갔던 현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이번 작품에서 권 작가는 ‘신사임당’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예술가적 면모를 상상을 통해서 이끌어내는 작업을 했다.

 

△여성 예술가의 새로운 원형 보여줘


“사람들은 여성 예술가의 원형을 서구의 ‘불행한’ 예술가들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죠. 예를 들어 까미유 끌로델 같은.”


권지예 작가의 말대로 기존의 여성 예술가는 불행한 존재들이다. 실력이 있어도 사회에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남성의 권위에 가려지기 일쑤였고, 예술을 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권 작가는 현모양처와 예술가라는 두 가지 이름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 신사임당에게서 새로운 예술가의 원형을 찾는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를 대표하는 여성이지만 한편으로 뛰어난 그림을 남긴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사임당에 대한 찬양적인 시선에 비해 자료는 미비한 상황이다. 권 작가는 ‘비밀 하나 없는 예술가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예술가라면 숨겨둔 상처가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그 상처가 예술작업에 가속력을 불어넣기 마련이다. 권 작가는 이러한 상상을 보태어 『붉은 비단보』의 주인공 ‘항아’를 창조한다.


소설에는 주인공 항아 외에도 두 여인이 등장한다. 항아의 어릴 적 동무였던 가연이와 초롱이다. 가연은 양반가에서 태어나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다가 요절한다. 초롱은 서출의 한계 속에서 결국 기생이 된다. 이 둘은 ‘불행한 여성 예술가’에 가까운 캐릭터인 셈이다. 항아가 신사임당이라면 가연의 모습에서는 허난설헌이, 초롱에게서는 황진이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세 인물 중에서 항아는 시대적 요구와 자신의 욕망을 가장 잘 조화시킨 인물이다. 항아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소중히 간직하지만, 때에 따라 감추기도 한다. 그 열정이 소중하기에, 오히려 지키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또 남편이 아닌 사랑하는 정인을 마음에 품고 살지만 그 기억 때문에 가족에게 소홀히 대하지는 않는다. 정인의 흔적을 모아둔 ‘붉은 비단보’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그림들을 모아둔 ‘푸른 비단보’는 항아가 두 삶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이라면 결혼도 선택의 문제니까 상황이 많이 다르죠. 하지만 결혼을 꼭 해야만 했던 그 시대 상황을 가정할 때 항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길을 간 셈입니다.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한 적정한 타협점을 찾기 위해 냉정하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 쿨한 여성인 셈이죠.”


권 작가는 작품 속에서 예술을 향해 무조건 돌진하거나 괴로워하는 것보다 적절히 융통성을 갖는 항아의 삶을 긍정적으로 그려낸다. 끝내 사회와 불화하는 초롱이나 요절하고 만 가연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시간을 잃고 만다. 이에 반해 항아는 인생에 적절히 타협하고 참아내는 한편 예술적인 열정도 유지한다.


이러한 항아의 모습을 권 작가는 ‘유능제강(柔能制剛:부드러운 것이 능히 단단한 것을 이기고 약한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부드럽다는 것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더 나아가 그는 항아라는 인물이 여성 예술가들의 고민을 풀 실마리가 되길 바란다. 권 작가는 항아를 통해서 여성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실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오늘날의 여성 예술가도 항아의 문제의식에서 자유롭지 않다.


“결혼을 하면 위기의식을 갖고 ‘예술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고 고민하는 여성들이 아직 많아요. 하지만 자기세계를 잃지 않고 자기 안에 품을 수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지요.”


실제로 육아와 일을 병행하다가 뒤늦게 다시 붓을 든 권 작가의 친구는 이 책을 보고 ‘나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다’며 동병상련을 느꼈다고 한다. ‘예술에 매진하지 않는 것에 대해 피해의식을 가져왔는데 이런 시각도 있구나’ 싶더라는 것이다.

△퓨전사극은 새로운 모험, 추리소설에도 도전하고 싶어


“작가로서 이제 10년, 저 스스로 자기 결산을 했죠. 그동안 너무 한가지 이미지로만 고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새로운 것이 해보고 싶었어요.”


권 작가는 퓨전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것을 두고 스스로도 ‘큰 모험’이었다고 말한다.


낯선 배경에서 역사적인 인물을 재창조한다는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작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고 전했다.


『붉은 비단보』를 쓰기 위해 권 작가는 신사임당의 영정을 문에 붙여두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마치 작가를 혼내는 것처럼 근엄한 모습이어서 결국 뜯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상상을 마음껏 풀어내다보니 글이 잘 풀렸어요. 그 다음에 신사임당의 영정을 봤을 때는 오히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지요.”


권 작가는 ‘상상은 소설가의 특권’이라고 말한다. 소설가는 사람들이 보는 것 이면에 가져진 모습을 상상해야하는 직업인만큼 앞으로도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어쩌면 작품 속 항아의 모습은 작가 권지예와 많이 닮아있기도 하다. 그는 대학 시절, 한 번 글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뜨개질의 올 풀리듯 생각이 쏟아지는 바람에 자주 밤을 새웠던 열정적인 문청이었다. <피꽃>이라는 작품으로 이대학보 문학상에 당선되기도 하고 여러 편의 소설과 수필을 학보와 교지 등에 기고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결혼생활과 교사생활을 병행하며 두 자녀의 엄마로 살다가 30대 후반에 등단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을 품고는 있었지만 그 열정을 잠시 접어두어야 했던 시기가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항아처럼 예술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생활과 예술을 융통성 있게 병행해왔어요. 물론 항아처럼 잘하지는 못해요.(웃음) 그러나 나름대로 두 삶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노력해 온 시간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앞으로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 추리소설을 비롯한 새로운 장르에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한다. ‘유능제강’이라고 했던가. 그 조용한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김강지숙 객원기자 12361215@ewhain.net


▲1997년 등단, 소설집으로 『꿈꾸는 마리오네트』·『폭소』·『꽃게 무덤』, 장편소설로는 『아름다운 지옥 1·2』가 있다. 그림소설집으로 『사랑하거나 미치거나』·『고흐, 서른일곱에 별이 된 남자』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권지예의 빠리, 빠리, 빠리』·『해피 홀릭』 등이 있다. 「뱀장어 스튜」로 2002년 이상문학상, 「꽃게 무덤」으로 2005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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