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들은 현대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칸막이화’(compartmentalization)를 말한다. 회사 사무실의 큐비클을 비롯해서, 효율성의 증대를 위해 편의로 쳐 놓은 칸막이들이 우리 문화에는 참으로 많다. 그 중에 우리의 삶을 가장 크게 바꾸어놓은 것은 아마도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사이의 칸막이이리라.

전문[노동]자들에 의한 임금제 생산으로 대표되는 공적영역과 낭만화된 가정으로 대표되는 비임금제의 사적영역, 이 두 영역 사이의 칸막이 사이에서 가장 곤란함을 겪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는 ‘엄마’의 역할을 감당하는 여자들이다.

관료제와 자본주의제가 삶과 노동영역을 분리한 이래, 손오공의 복제술을 배우기 전에야 ‘나인 투 파이브’의 근무시간[실은 그 이상]을 요구하는 공적영역에 속한 전문인이면서 동시에 육아를 담당하는 ‘엄마’일 수는 없게 되었다. 현대문화적 산물로서의 ‘전업주부’는 그래서 만들어졌다.

전통문화에서 귀족여성은 전업주부이지 않았다. 그녀들이 예경을 읽고 시를 쓰고 난을 치던 동안 유모와 찬모가 육아와 가사노동을 전담했을 터이다. 평민여자 역시 전업주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들은 밭일을 하고 베를 짜는 생산노동을 해내느라 육아와 가사를 위해 정진할 시간도 에너지도 없던 터였다. 오로지 효율성과 생활합리화를 찬양하는 현대문화에 와서야, 사적영역에 있으면서 ‘전업으로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그래서 공적영역의 인력자원(남편과 아이들)의 활력공급과 재생산을 담당하는 ‘전업주부’가 필요해진 것이다.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는 전문성, 회사의 필요에 따른 빠른 이동성을 요구하는 무한경쟁의 현대문화에서 전문인이라면 사적 영역의 제한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며칠 전 전공의 시험에서 평균이상의 높은 성적을 가진 여의사들이 ‘출산포기각서’라도 쓸 테니 제발 뽑아달라고 호소중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노동과 삶이 분리된 현대문화에서, 출산과 그에 따른 휴직기간은 경쟁력 있는 전문인에겐 결정적 약점이 된다. 골드미스가 많아지고 스완족이 등장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결국 현대의 칸막이 문화에서 사적영역에 ‘대체인간-보모이거나 친정엄마이거나-을 하나 확보’해 놓지 않는 한은, 여자는 ‘골드미스’이거나 ‘전업주부’이거나 그 어느 한쪽 영역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여성학과 문화이론을 배우며 자주 들었던 이야기였건만, 그 칸막이를 보게 된 것은 막상 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후였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대체인간’을 ‘확보’하지 못했던 난, 박사학위논문을 위한 자료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고, 해서 참으로 용감하게도--글쎄 ‘창의적으로?’--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는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던 적이 있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던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쯤은 참을 수 있었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애를 업고는’ 공공도서관출입을 할 수 없다는 법규였고 그 법을 너무도 충실히 수행하던 수위아저씨였다. “애 엄마가 집에서 애나 보지. 극성은...” 하는 핀잔을 들으며 돌아서 길을 내려오자니 눈물이 났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사이에 드높이 쌓아져 있는 칸막이가 비로소 보였다. “얼마나 많은... 반짝반짝 빛나던... 여자들의 꿈이 ‘사적 영역’의 칸막이 너머에서 좌절되고 쪼그라들고 사라져갔을까?” 그런 질문들을 하며 길을 걷다보니, “삶과 일을 재통합할 제도적 대안은 없는 걸까?” 하는 아주 스케일이 큰 질문에까지 이르렀다.

답은 ‘제도’(institution)라 믿는다. 제도가 ‘합의에 이른 같이 살기의 방식’인 이상 우선 그 제도를 바꾸려면 일과 삶의 재통합을 실험하는 창조적 개인이 많이 나와 줘야 하겠다. 그래야 그 통합의 삶을 ‘당연시 여기는’ 문화가 형성될 테고, 그런 문화적 전제를 기반삼아 제도적 변화도 뒤따를 테니 말이다. 그런 일을 이화가 했으면 한다. 이화니까 해냈음 좋겠다. 악바리 같이 칸막이를 넘어와서도 여전히 두 영역 사이에서 저글링에 블렌딩으로 줄타기 같은 삶을 살며 내가 보게 된 건, 칸막이 너머 저쪽에서 사는 그녀들의 꿈이다.

여전히 자기 안의 창조성을 세상에 표현하고 싶고, 여전히 공적영역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원하는... 그녀들의 눈물이다. 소수의 글로벌 리더양성으로 만족하는 이화가 아니었음 한다. 현대문화의 칸막이를 허물고 삶과 일의 재통합을 이루는 ‘창조적 개인들’을 배출하고, 제도적 개혁의 장으로 ‘저 너머 그녀들’을 초청하는 일에 앞장서는 이화였으면 한다. ‘골드미스’와 ‘전업주부’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하기엔, 이화인의 꿈과 가능성이 너무 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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