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시간에 ‘나는 보수인가, 진보인가’라는 주제로 과제를 해 간적이 있다. 과제발표시간에 놀랐던 것은 많은 학생들이 자신을 보수라고 소개한 점뿐 아니라 그러한 성향을 갖게 된 계기를 하나같이 현 정부의 무능 탓으로 돌린 점이었다.

[3불 정책 폐지],[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기치를 내건 보수정당의 한 대통령 후보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지지율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이 후보와 정당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고민거리인 청년 실업문제를 포함한 경제문제들을 ‘효율적’인 방법으로 속시원히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현재 여당과 야당은 ‘효율 대 형평’의 대결구도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비대칭적이며 불공정한 일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구호를 외친 노무현 정부에서 벌어진 걸 생각하면 노무현 정부가 ‘효율’의 맞은편에 설 자격은 있는 건지 의아해진다.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 고공행진은 어떤 형태의 변화라도 기존의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단순한 기대 심리로 인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큰 변동사항이 없는 한 이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확신하고 있는 분위기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명박 후보 관련 업체 주식이 상승세로 치닫고 있다는 경제기사를 본 적이 있다. ‘리엔지리어링’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위장한 카오스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자신을 진보의 입장에 있다고 믿었던 대학생들조차도 야당이 주장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효율성 우선의 정책에 마음이 가 있는 듯하다. 리처드 세넷의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라는 책에서는 우리의 이런 태도를 비판한다. [유연성]이라는 단어부터 살펴보자. flexible이라는 단어는 나무가 바람에 휘어졌다가 다시 펴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이 단어의 의미는 구부러지게 하는 쪽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비대칭적이고 불공정한 많은 일이 실제 노무현 정부의 '기업하기 좋은 나라' 구호를 외치는 동안에 벌어졌다. 그리고 무능한 한 대학생의 입장에서 푸념하자면, 그 직접적 피해를 지금의 대학생들이 보고 있다. 그런데 다음 정권이 바뀐다고 달라질까. 국민소득 4만 달러는 이룰 수 있을까? 국민소득 4만 달러가 되면 이 세상이 천국이 될까? 이 절박한 젊은이들이 최소한의 숨통이라도 틔울 수 있게 될까?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사회나 20대라면 기존에 있는 세계의 룰에 처음 내던져져서 그와 맞부딪히게 되는 시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룰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언제나 공명정대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젊은 세대는 이에 적응하거나 저항하거나 이를 변화시키려 노력할 수 있다.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일궈낸 것이 그러한 예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의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기저기서 대학생의 보수화를 말한다. 사회가 짜놓은 룰을 변화시키려기보다 졸업 후 빨리 경제조직에 진입하기위해 모든 젊은 힘을 쏟고 있는 것이 우리 대학생들의 현 모습이다. 내가 널 이기지 못하면 나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긴장으로 가득 찬 도서관은 차라리 아귀다툼의 현장이다. 그러나 현재의 룰에 적응하여 따라간다고 해도 안정적인 삶이 기다린다는 보장은 없다. 저항이나 변화와 같은 부담스런 행위가 아니라도 그냥 순응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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