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을 하는 소리꾼 채수정(한국음악과,94년졸)씨

사진 : 장예슬 기자 yeseulhere@ewhain.net 
병풍을 드리운 작은 방. 커다란 거울 속에 곱게 한복을 차려 입은 모습이 비친다. 이내 화장을 시작한다. 한 올 한 올 속눈썹이 까맣게 올라가고, 입술은 장미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 넘겨 쪽을 진다. “꾀꼬리 수리루리루 저 꾀꼬리 초평대로(草坪大路)를 마다허고.” 대뜸 적벽가 한 가락을 뽑아내는 채수정(한국음악·94년졸)씨를 18일(화) 미아리 고개에서 만났다.

“나는 굿판 벌이는 소리꾼이요.” 채수정씨가 대뜸 운을 뗀다. 지난 달 15일(토) 의정부에서 열린‘굿 음악제’에서 본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채씨는 굿판에서 당골(무당)로 ‘커밍 아웃’한 소리꾼이다.

채씨는 명창 박송희 선생의 수제자다. 2002년에는 프랑스에서 ‘흥보가’를 완창하는 공연을 열기도 했다. 채씨의 소리를 두고 언론은 ‘가슴이 터질 듯한 강렬한 소리’·‘기교를 부리지 않고 쭉쭉 뻗어내는 소리’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화려한 시절이었다.

이렇게 화려한 이력 뒤에는 피나는 노력이 숨었다. 10시간 가까이 이뤄지는 판소리 완창은 한 마당 마치고 나면 살이 쏙 빠질만큼 힘들다. 그러나 무대에 올라서면 쩌렁쩌쩡한 목소리를 뽐내는 그에게는 분명 남다른 비법이 있을 터.

“영화 서편제를 보면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하라’는 말이 있지요.” 득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그는 강원도 정선의 산골 마을로 들어갔다. 폭포수를 맞으며 소리 공부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든 법임에도 그는 꼬박 백일을 견뎠다. 채씨는 “외로움과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목에서 피는 안나더라”며 껄껄 웃는다. 그러고선 또 ‘흥보가’ 한 소절을 뽑는다. 흥보가 박 타는 대목이다. 착한 일 하고 재물을 얻은 흥보와 노력 끝에 걸죽한 소리를 얻은 채씨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그에게 인생의 8할은 소리다. 목청 좋은 다섯 고모의 손에서 진도 아리랑을 들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소리는 채씨를 생각지도 못한 길로 이끌었다.

대학 졸업 후엔 MBC ‘한국 민요 대전’이라는 프로그램의 구성 작가로 활동했다. 우리의 소리를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잊혀진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기를 쓰고 방방곳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 채씨는 대학로 두레극장에서 채정례 당골의 ‘씻김굿’을 보게 됐다. 순간 답답했던 가슴이 ‘뻥’하고 뚫렸다.

“판소리의 신명을 어떻게 되살릴까 고민하던 중 굿에서 ‘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됐지요.” 그에게 굿은 한이 아니라 신명나는 한 ‘판’이다. 생로병사·희로애락이 담긴, 모든 사람이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삶’이다. 그래서 그는 굿을 ‘굿(Good)’이라 표현한다.

굿의 매력에 빠진 채씨는 이후 10년을 채정례 당골을 따라 진도 초상집을 돌아다니며 굿판에 섰다. 씻김굿(사람이 죽었을 때)·성주굿(이사갈 때) 등 그가 서지 않은 굿판은 없었다. 그러나 소리꾼이 굿판에 서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어느 날 진도 군수가 굿판에 선 채씨를 보고 그의 부모에게 “따님이 판소리 해서 교수되는 줄 알았더니 당골 됐습디다”했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채씨는 “판소리가 예술이면 굿은 예술의 어머니”라며 부모와 스승을 설득했다. 그의 설득에도 스승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기색이다. 그러나 굿을 향한 그의 고집도 쉬이 꺾이지 않는다.

공자는 불혹의 나이를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라고 했다. 곧 불혹을 바라보는 채수정씨. 더 이상 굿과 소리를 구분지어 갈팡질팡하지 않는다. 그는 2일(화) 국립 국악원 무대에 올릴 ‘적벽가’완창도 준비 중이다.

요즘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도 욕심이 난다는 채수정씨.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열댓명의 학생을 모아 놓고 ‘흥보가’를 가르친다. 그 중에는 머리 희끗희끗한 만학도도 있다. 학생들은 모두 목에 핏발이 서도록 소리를 내지른다. 우리 가락에 마냥 흥겨워 엉덩이를 들썩인다. 북채를 잡은 채씨의 손에도 슬며시 힘이 들어간다. 그칠 줄 모르는 자진모리 장단에 방은 어느덧 후끈하다.

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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