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에서 돼지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기독교와 현대문화> 첫 강의를 열며 학생들에게 늘 묻는 질문이다. 종교와 문화에 대한 남다른 진지성으로 종교 관련 교양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인데... 시작부터 ‘돼지의 운명’ 운운하는 상황을 당하면 대부분 표정들은 ‘대략난감’ 그 자체다.

“먹히는 것이요!!” 침묵을 깨고 용감하게... 돼지의 운명은 ‘삼겹살, 목항정살, 햄이나 베이컨, 혹은 통구이가 되어 생을 마감하는 것’이노라 답하는 학생도 가끔 있다.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 학생이 태어난 이래 그녀는 돼지에게서 ‘다른 가능성이 현실태가 되는 사례’를 도대체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먹는 방법’은 바뀌었을망정 돼지는 꾸준히 인간의 밥상에 오르는 주요 고기요리여 왔으니 이를 ‘당연시’(taken-for-granted) 여길 일이다.

돼지의 운명은 ‘당연 먹거리감’이라 여겨온 학생들과 함께, 이번 학기도 난 <베이브>를 감상하며 한 학기를 연다. ‘베이브’는 ‘꿈꾸는 돼지’다. 엄마돼지가 커다란 글자[‘맛있는 햄’]가 쓰여 있는 트럭에 실려 간 이래, 베이브는 농장에서 ‘양치기 개’인 ‘플라이’의 사랑과 격려 속에서 자라게 되고, 자연스레 ‘양치는 돼지’가 되는 꿈을 꾸게 된다. 농장의 동료 짐승들은 ‘돼지가 양치는 꿈’을 꾸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원래 그래야하는 법칙’을 어기는 행위라고 충고한다. 그저 밥 잘 먹고 잘 자며 몸뚱이를 키워서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밥상에 오르는 것이 ‘돼지의 원래 그래야하는 법칙’이라는 친절한 설명과 더불어...

“정말... 돼지의 가능성은 오로지 ‘먹히는 것’뿐일까요?” 여전히 당황스러운 표정의 학생들에게 난, ‘돼지를 먹는 것으로 당연시 여겨온 것’은 오직 ‘문화적 전제’일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세상에...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은 없다.

처음부터 ‘원래 그래야하는 법칙’이란 것도 실은... 없다. 지금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적 전제일 뿐이다. ‘알고’ ‘배우고’ 나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살아가는 전제들의 많은 부분들이 실은 유교적 조선의 사대부라든가, 서구근대사상가집단이라든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옹호자라든가 하는... 집단역학(group dynamics) 안에서 힘을 가지는 특정인들에 의해 규정되고 조성되고 주장되어온 문화적 전제임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여자의 당연한 도리’라 결정하던 집단 안에서 여성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지구생명 전부가) 그 ‘당연함’을 만들어내는 집단역학에서 배제되어 왔는지... ‘안다는 것’은, 삶을 바꾸는 힘이 있다.

난, 내가 만나는 학생들이, 이화인들이... 이 땅에서 ‘베이브’로 살아가는 꿈을 꾼다. [참, 베이브는 결국 ‘양치는 돼지’가 되었다.] ‘삼종지도’가 더 이상 우리의 문화적 전제가 아닌 오늘이 있기까지 이화의 선배들이 큰 역할을 해내주었듯이... 이화인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신자본주의 문화환경의 ‘생명을 거스르는’ 문화적 전제들을 ‘평화롭게 전복’하는 문화적 창조자들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모든 인간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고 ‘돈은 능력과 가능성’의 동의어라 가르치는 신자본주의 문화는 ‘경쟁’이 최고의 덕목이며 ‘우승’은 최종의 목표임을 ‘당연시’ 여긴다. 이러한 문화적 전제는 동료인간이든 자연이든 나의 발전과 성취를 위해서는 딛고, 밟고, 이용하고, 정복하는 것을 ‘당연하다’ 한다.

 ‘산동네 어린이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잘못된 꿈’이라 일찍부터 가르치는 이 문화의 전제들은 바뀌어야 한다. 모든 생명이 스스로의 꿈을 키우는 환경조건으로서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화의 그 처음이 그랬듯이, 이 학문의 장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문화적 창조자로 살아갈(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힘이 난다. 신명이 난다. ‘플라이’의 기대와 기쁨이 이런 것이었을까?

백소영(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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