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 순수문학

 

  이른바 부르조아 계몽주의 문학의 실체와 그 의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이 글에서 우리의 논의는 대단히 압축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하겠다.


  봉건사회로부터 근대 시민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 떠오른 부르조아 계급의 한 이념적 도구로서의 계몽주의가 우리 역사에 그래도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한나라 역사의 특수성이랑 어디까지나 세계사의 보편성을 통해 관철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부르조아 계몽주의라는 주제 아래서의 문제의식은 대개 다음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봉건사회 말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서 이른바 부르조아 계몽주의의 실체란 무엇인가? 즉 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집단적 대응 양식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이념적 정향을 어떻게 구체화시켰으며, 또한 그것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둘째, 그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속에서 확대 ․ 재생산 될 때에, 그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셋째, 이러한 고찰의 결과로부터, 우리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데에 어떠한 실천적 이론들을 얻어낼수 있을 것인가?

  

  이 글에서 우리가 부르조아 계몽주의와 그의 문학적 표현물로 살피고자 하는 대상인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의 정신사적 계보는 도산 안창호와 유길준으로 연결된다.


  이른바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유길준은 그의 저서 「서유견문」을 통해서 봉건 조선이 하루 빨리 「개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때에 그가 모범으로 삼은 것은 서양의 여러나라, 그 중에서도 미국이었다. 그는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에서 간파한 직업의 「소명의식」을 「애국심」으로 환치시킨 후 새 사회 건설의 목표를 「서구적 자본주의화」로 정식화했다.


  또한 그가 가장 숭배하는 인물중의 하나는 그의 스승이기도 한 일본인 복택유길(福澤兪吉)이었는데, 복택은 일본의 소위 명치유신기의 민권 운동가이며 자유주의자였다. 그런데 이 복택이란 자는 이른바 탈아론(脫亞論)주의자로서 일본의 소위 대동아공영권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을뿐만 아니라, 임오년에 우리나라에서 군인봉기가 일어났을 때에 무력간섭을 주장하기도하고, 「조선정부는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민을 위해서는 조선이 러시아나 영국등 외국에 의해 점령당하는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하기도한 인물이었다.


  안창호는 유길준의「서유견문」을 읽은 뒤 크게 감명을 받고 그를 평생 존경하면서 조선을 이끌 지도자는 유길준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미국과 미국식 자본주의를 얼마나 흠모하고 있었던가는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 서 처음 본 미국의 영토 즉 하와이의 한 봉우리를 보고 자신의 호를 「도산」으로 지었다는 일화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한편, 안창호가 평생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흥사단」의 전신인 「청년학우회」에서 최남선은 총무를 맡았고, 이광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안창호와는 거의 일심동체의 인물이었다.


  이 관계들은 식민지 이전 이른바 개화파의 이념적 지향으로부터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등의 「독립협회」의 이념, 그 다음, 1905년 이후 「신민회」,「청년학우회」, 「대성학교」,「대한자강회」,「대한협회」,「서북학회」등의 자강운동, 실력양성론, 그리고 식민지이후 이른바 민족개량주의, 자치론, 준비론, 외교론, 참정권론등이 다 한몸으로 연결된 한뿌리에서 나온 조금씩 다른 가지임을 말해주는 지표의 하나이다.


  각 시기마다 조금씩 그 성격과 의미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들의 일관된 공동점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완고하게 강화되어 마침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굳혀지는 그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①자본주의적 근대화론, ②정치적 무의식으로 요약할수 있다.


  서구적 자본주의를 이식하고자하는 이들의 열망은 19세기후반 심화될대로 심화된 봉건적 질곡 앞에서는 그 나름의 진보성과 진정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 시기에 있어서 조선에서의 자본주의적 발전이란 제국주의화한 세계자본주의체제로의 강제적 편입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후발 자본주의로의 진전도 청일전쟁을 계기로 완전히 단절된 시점에서 그것은 식민지로의 전락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자본주의적 근대화론자들은 이러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깨달은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이미 그는 자본주의적 근대화론의 대오에 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자생ㅈ거이든 타율적이든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흉포화한 제국주의의 발톱 아래 자신과 조국의 운명을 내맡기는 것임을 의미하게 될 때에, 이른바 부르조아 계몽주의의 발톱 아래 자신과 조국의 운명을 내맡기는 것임을 의미하게 될 때에, 이른바 부르조아 계몽주의의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놓여있었다. 하나는 말 그대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하여 반제 ․ 반봉건의 과제를 자신의 임무로 삼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현실과 괴리된 허위의식을 절대의 이상으로 간직한 채 그것의 실현을 제국주의체제 내에 의탁하여 도모하는 길이었다. 자본주의적 근대화론자들이 선택한 길은 불행하게도 후자의 길이었다.


  이러한 선택의 구체적 표현이 바로 안창호 사상의 핵심인 「무실」․「역행」그리고 그것의 실현으로서의 「청년학우회,「신민회」,「수양동우회」등의 「탈정치화」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의 전파자요 부흥사로서 이광수의 역할은 그의 대표작인 「무정」,「흙」등과 「민족개조론」,「대구에서」,「농촌개발」등의 숱한 논설을 통해 실로 눈부시게 발휘되고, 엄청난 대중적 영향을 끼치면서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의 기본적인 논지는 봉건유습의 타파, 조선사회의(서구적)자본주의화, 그 실현의 방법으로서 개개인의 인격수양과 근면, 성실, 정직등의 도덕성의 강화같은 것이었는데, 이것은 물론 그의 스승인 안창호의 사상을 더욱 정식화한 것이었고, 또한 이러한 사고는 식민지의 구체제를 일정하게 붕괴시키는 한편 피식민지인의 의식구조에 민족적 비하감과 열등의식을 조장함으로써 지배의 편의를 얻고자 하는 제국주의자의 이해에 더할 수 없이 긴요한 품목이 아닐 수 없었다.


  이광수가 이러한 사태를 깨달았을 때에 도피해 간 통로는 실로 아이러니칼하게도,「단종애사」,「마의 태자」등에서 대푲거으로 드러나는 봉건주의였다.


  최남선의 계몽주의 역시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었다. 그의 유명한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나 「경부철도가」등이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이상을 구가한 것임은 더 이상 설명할 나위가 없겠거니와, 그가 이광수식의 민족개조론을 펼치고 마침내 복고주의와 국수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던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최남선은「조선역사」(1931)의 서문에서, 조선인은 응집성, 집결력이 부족하고, 공적양심 및 용기가 결핍되어 있는데 그것은 「국민적 저능의 표징이고, 또한 질서성 ․조직력이 부족하며, 뇌동적이고 구안증(苟安症), 무관심증, 불철저증, 건망증을 가졌고, 조선인의 생활과정은 암만하여도 「맹목적 행진」이라고 하였다. 한때의 신신사상(?)의 영도자였던 그가 1930년대에 느닷없이(?)「시조부흥론」을 외치고, 「조선의 얼」을 찾게되는 과정속에서 우리는 19세기 후반이후 식민지 치하에서의 이른바 부르조아 계몽주의의 다양한 변주들, 그것의 실체, 그리고 그의 종국적 귀의처를 읽는다.


  부르조아 계몽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은 서구 특히 미국을 모델로 한 자본주의 근대화론, 자강론, 민족개량주의, 자치론, 준비론, 외교론, 참정권론 등의 다양한 형태로 변이되면서 한국 근대사에서 강력한 실체로 존재하였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이념이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확대 ․ 재생산 될 수 있었던 실제적 기반은 무엇이던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한국사회성격의 그러한 조건으로부터 배태되고, 그러한 조건의 강화로부터 성숙하였던 것이다.


  식민지 이전 시기및 반식민지 시기의 부르조아 계몽주의는 서구 기독교및 전통사회의 중인계급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안창호는 1907년의 귀국연설에서 「기독교는 만국의 통교(通敎)라 기독교를 믿으면 적이없다. 그리고 부득이하여 국(國)의 독립을 「의뢰」치 않으면 아니될 제(際)는 세계 최강의 국에 의뢰할지니」라고 하였고 「청년학우회」의 설립위원장과 「대성학교」의 교장을 지낸 윤치호 역시 「기독교는 조선의 구원이요 희망」이며 「기독교화 다음에 일본화가 조선에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의식은 안창호가 스승으로 삼았던 유길준에게서도 이미 노골화된것이었다.


  이러한 구도 아래서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지고의 이상으로 내면화한 부르조아 계몽주의가 제국주의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된 역사의 시점을 오히려 자신의 발전으로 인식하 f수도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러한 형편에서 애초에 그것이 지니고 있었던 일말의 정치의식및 그 실천력은 거세될수 밖에 없었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식민지화에서의 부르조아 계몽주의의 자기실현이란 본질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및 그 대행기구로서의 총독부 권력 그리고 그에 기생하는 매찬 부르조아 집단의 이해관계에 긴밀하게 조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부르조아 계몽주의가 일관되게 내세운「탈정치화」의 논리가 문학의 부문에서 철저하게 관철된것은, 이른바「순수문학」, 「예술지상주의」등으로 표상되는 「정치와 문학의 단호한 절연」의 논리였고, 이것은 김동인, 이효석등을 통해 그리고 그 이후의 숱한 작가들을 통해 방대한 양의 문학사로 집적되었다. 그런 뜻에서 김동인은 이광수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승」한 것이었다.


  8. 15이후 남한에서의 부르조아 계몽주의의 확대 ․재생산을 가능케한 기본적인 조건은 물론 미군의 점령과 이승만 단독정부의 수립, 분단의 고착화, 신식민지적 쟃편과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있었다. 이렇듯이 한국의 근대사에 있어서 이른바 부르조아 계몽주의는 반민족적, 빈민중적, 외세영합세력을 자신의 존립기반으로 하여, 역사의 각 시기마다 그 현상적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면서 본질적인 속성에 있어서는 일관되게 체제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여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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