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당선2
단편소설 당선2
  • 안미숙
  • 승인 198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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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줄기는 제법 굵어지고 있었고 이따금씩 하늘을 찢어버릴듯한 번개가 천둥소리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카페안은 밖과 별 다를바없이 어두웠지만 훨씬 더 아늑하고 물기없는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주인은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비에 분위기라도 맞춰줄 요량인지 실내의 등을 거의 다 꺼버리고 테이블마다 초를 켰다. 커피빛 탁자위로 붉은 몸뚱아리를 가진 촛불은 날름거리는 불꽃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 이어서 그녀는 정신없이 그 요사스러운 불길에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불꽃은 끊임없이 춤추며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하나도 뜨거워 보이지 않는 심지 주위의 파란 섬광을 입술로 빨아들이고 싶은 생각에 훅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상상은 자꾸 저쪽 맞은편 의자위에 진수를 앉히고 싶어했다. 연분홍색 장미꽃이 가득 피어난 소파는 어두운 조명탓으로 베이지색으로 보여졌다.


  실내에는 바이얼린의 매끄러운 선율이 고급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값비싼 음악회 티켓을 두장 들고 왔을 때 그의 당혹스러웠던 표정이 상기되었다. 외국에서도 유명하다는 그 교향악단의 입장권은 학생으로서는 선뜻 사기가 어려울만한 가격이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그가 더욱 기뻐해줄줄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쓴웃음이 깃든 침묵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라서 안절부절 이었다. 그날 들었던 베토벤의 아름다운 작품61은 바이얼린협주곡의 왕자라고 불리워지는 품격의 고상함을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그 당당함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음악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의 밤공기는 차가왔다. 거리의 수은등은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그의 입술은 불빛 때문에 연보라빛으로 탈색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릴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인적이 드문거리를 한동안 걸었고 그녀를 집앞까지 바래도 주고 돌아가는 그이 뒷모습은 빈 들판처럼 적막했다. 그녀의 가슴에는 바이얼린 음색의 파편과 이국의 밤처럼 느껴지던 서러운 수은등 불빛과 그의 다문 입술이 앙금처럼 낮게 고여서 진수의 등을 쫓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휘청휘청 걸어가서 마침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하늘은 어두운 오렌지빛 구름으로 대기중에 부유하고 있었다.

  

  비가 그쳤다. 빗물로 닦여진 아스팔트는 검은 유리처럼 반짝반짝 빛났고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도 하늘을 닮아 구름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녀는 찻값을 지불하고 거리고 나섰다. 비가 온 뒤의 상쾌함이 개구쟁이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당겼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를 무심결에 쓰다듬으며 그녀는 집으로 향했다. 비오기전의 일이 말짱 다 영화속의 일처럼 아릿하게 여겨졌다. 도서관에 그대로 펼쳐놓고 온 책과 노트 생각이 떠올랐지만 귀찮고 번잡러운 모든 일은 이순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진수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길 모퉁이 수퍼마킷 옆에 주홍색 공중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천천히 동전을 집어넣고 다이알을 돌렸다.


  사랑해 다른 아무말은 하고 싶지가 않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말 뿐이야. 사랑해 내가 네 빈 등을 껴안아주고 싶어 다시는 그렇게 쓸쓸한 모습 보고 싶지가 않아.


 -뚜뚜뚜뚜…


  전화는 통화중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조그맣게 오무려 천천히 발음했다. 사 ․ 랑 ․ 해


  시옷과 아와 리을과 아가, 이응과 히읏과 애가, 원래부터 아무런 의미없는 문자의 조합이었던 것처럼 공중에서 분해 되었다. 사아라앙해에-


  그녀의 뒤에서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초조함을 과시하던 젊은 남자가 흥미가 담긴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탐욕스러운 눈빛이엇다. 그녀는 순간 용기를 상실해 버렸다.


  얼굴을 붉히며 돌아서 내딛는 발걸음이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서투르게 휘청거렸다. 빠른 속도로 그곳을 벗어나면서 그녀는 문득 꿈에서 생시로 아니 영화속에서 현실로 되돌아온 느낌이었고 그녀가 잃어버린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리엔 어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잇었고 사전 양속이라도 한것처럼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빛을 발했다.


   도시적인 화려함과는 사뭇다른 느낌이었는데도 그녀는 문득 학교 축제의 밤을 찬란한 비상을 하려고 몸부림치는 거리에서 연상시켰다.


  축제 마지막날 교내의 록그룹사운드를 함께 구경하고 그녀와 진수는 캠퍼스가 잘내려다 보이는 언덕위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멀리서 현수막등을 태우는지 캠프 파이어의 불꽃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100m도 넘는 거리였지만 불꽃의 화려함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에도 비춰지고 있었다.


  그는 갓 세수를 하고 난 조그만 소년같이 씩씩한 음성으로 얘기했다.


 - 나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수 있는걸 공부하고 싶어.


  그녀는 그게 무어냐고 묻지 않았다.


  언젠가 그의 친구로부터 그보다 아홉 살 연상의 누님이 노동운동과 노조 활동으로 감옥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말은 진수에게 확인시킨다는건 그녀의 아버지가 제법 커다란 공장을 두채나 소유하고 있는 「부르조아」라는 말을 하는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사장님」이라는 걸 어린 시절부터 자랑으로 여겨오고 있었고, 최소한 남들 앞에서 떠벌릴만한 일이 못된다는 걸깨닫게 된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였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그날 잠, 그녀에게 분명히 중요한 것은 그의 존재였지 그의 관념이 아니었다.


  -우리두 스크럼 짤까?


  캠프 파이어 주위로 어깨를 에워싼채 노래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듯 들어왔다.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승낙을 표시했고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위로 얹혀졌다.


  비온 다음날 아침다웁게 하늘은 빨려들어가 버릴것만 같은 코발트블루였다.


  초여름의 하늘엔 구름 한점 없었고 신록은 그 여늬때 보다도 싱싱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수연은 발걸음이 공중에서 부웅 뜨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침은  갓 따낸 사과처럼 싱그러웠고 그녀는 스무살 아름다운 아침의 어느날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는듯 대기를 힘껏 들어 마셨다.


  학교 앞에는 꽤 많은 학생들이 들어가지않고 서있었다. 문득 지하철역 앞에 납으로 만든 병정처럼 서있던 전경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어제의 일도 있었으므로 설마하는 심정으로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학생들이 열을 겹으로 이루며 서있는 담벼락에는 여러장의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대자보를 읽고 있는 학생들의 표정에 평소와는 무언가 다른 김장감이 흘렀다. 그녀는 왠지 그냥 지나갈 수 없을것같은 생각으로 머뭇거리며 틈새를 살폈다.


  키가 큰 남학생들 때문에 잘 보여지진 않았지만 XXX학우 분신자살이라고 붉은 매직으로 씌여진 큰 글씨가 단박에 눈에 뛰어들었다. 울컥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한발 앞으로 나섰다. 대자보 밑쪽으로 초점이 흐린 여러장의 사진이 어지럽게 붙어있었다. 희미하게 잡혀진 사진 속의 불꽃은 곧 그녀의 가슴에 달려들어와 그녀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그녀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맥박이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생전 보지도 못한 한사람의 죽음이 그녀에게 가져다 준 건 분노외에 진한 슬픔과 절망감이었다.


  생활에 대한 절망감, 사회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영혼에 대한 깊고 깊은 절망감.


  수업을 듣기위해 건물로 행해지는 발걸음은 아침과 달리 무거웠다.


  그녀는 진수와 교양과목시간표도 똑같이 짰었다. 강의실은 거의 다 찼는데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를 위해 비워둔 옆자리는 한사람분의 부피 이상으로 그녀를 허전하게 만들었다.


  마이크를 통해서 들려지는 교수의 금속냄새가 나는 목소리를 번번히 놓치면서 그녀는 건성으로 필기를 하고 있었다.


깜박 실수로 떨어뜨린 볼펜이 왼 발 위로 꼬고 있는 그녀의 오른쪽 발등을 건드려 전기를 띄었다. 순간 다리고 심하게 저리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그녀는 구두속으로 엄지발가락을 오르렸다.


  등에 불이 붙어 한 마리 절규하는 짐승같은 표정으로 외치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쌂이란 모든 인간에게 다른 형태로 다가온다. 그러나 죽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은 하나도 없다. 인간의 죽음은 삶의 종착역과 하나의 의미를 지닌 완성이어야만 한다.


  살기위해서 죽어진 사람의 모습이 흐린 인화지를 통해 그녀의 가슴에 선명하게 부딪쳣다.


  수업이 끝났는지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노트와 책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일어서는 그녀의 시선끝에 책상위에 쓰여진 문장하나가 잡혀왔다.


  인간 20세에는 아무리 현명한 자라도 자기가 경험한 일 외에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누군가의 낙서에 불과한 그글은 학생들의 손때가 묻어 군데군데 지워지고 번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빈 강의실을 나섰다. 의외로 그가 문밖에 서있었다.


 - 왔으면 수업들어오지 않구 뭐했어? 그녀의 단순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둔 사람처럼 어물어물 대답을 못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재빠르게 감지한 그녀는 말없이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캠퍼스의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려 ‘쏴아 파도소리를 냈다. 아직 오전인데도 어디선가 사물놀이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 얘기가 있어.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낙을 표시하고 그를 쳐다보지 않앗다. 둘의 발걸음은 한마디의 동의없이도 캠퍼스 뒤쪽의 동산으로 향해지고 있었다.


  둘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벤치위에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침묵하고 있었지만 둘의 침묵이 그 종류가 다른 것이라는 것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 너무 어른같은 얘기라서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널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어.


  그의 말은 농도짙은 알콜처럼 빠르게 그녀의 혈관 전체에 퍼졌다. 뭔가 얘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녀는 한마디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네가 참 좋은 애라는걸 알아. 누구에게서든 사랑받을 수 있을거야.


  그녀의 입가에는 누구에 대해선지 모를 조소가 번지고 있었다.


  -난 요즘 많이 생각해봤는데 이제는 결심을 해야할 시기라는 걸 느꼈어. 지금까지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왔던것 같아.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들이 너는 별로 탐탁치 않을 거야 널…정말 좋아했어. 미안해.


  그의 미안해 하는 말과 함꼐 그녀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계속외치고 있었다. 왜날더러 따라오라고는 못하니 네가 손만 내밀어 주면 어디든지갈텐데, 왜 설득시킬 생각은 않고 포기만하니, 바보아.


  그것은 분명 절규였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앗다.


  그의 죄스러워하는 얼굴이 그녀를 더욱 석고로 만들어 버렸다/


  -난 괜찮아.


  수연은 의외로 자신의 목소리가 침착하게 울려 나오는걸 느꼈다. 마치 모든건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던 것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수연은 자기를 포함한 그 상황이 영화속의 일처럼 그녀의 눈에 비춰지는걸 느낄 수 있었다.


  -절망 미안해.


  그녀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결코 미워할 수없게 만드는 선량한 눈동자가 그녀를 염려스러워하고 있었다.


  -정말 괜찮아.


  그녀는 애써 명랑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에 재빠르게 대답하고 날름 혀를내밀었다. 가식적인 천진함이라는걸 느끼면서도 그의 얼굴엔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희미한 분노를 느꼈다. 어려운 행사를 치뤘다는 표정으로 그는 내려갈 것을 제의했다.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를 먼저 가라고 떠밀었다. 그는 혹시 그녀가 어떻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의연한 표정으로 미소를 띄우고 그를 내려보냈다. 그가 뒤돌아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계속 입가에 웃음을 묻히고 있던 그녀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게 되자 자신에 대해 심한 구역질과 혐오감을 느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꺽꺽 소리내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어디선가 때이른 매미가 따라 울고 있었다.


  분신자살 사건 이후로 학내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매일이다시피 시위와 데모가 끊이질 않았고 몇몇에서는 수업거부 움직임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일 이후로 그와 단둘이 있게되는걸 되도록 피했고 사실상 노력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여느때완 달리 생기가 넘쳐 늘 동분서주였고 수업시간에 그녀의 옆자리에 앉는 일도 점차 회수가 줄어 들었다.


  이마로 등으로 흘러내리는 땀으 짜증스러워 할만큼 여름은 본격적으로 시작될 기세였고 또 한번 진수는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가 미더워 마지않는 조직의 동료들과 함께.


  그녀의 입술이 바싹 바싹 타들어가는걸 느끼면서 하루가 1년만큼 길게 느껴지는 열흘을 기다렸다. 반성문을 쓴 아이들은 사나흘 만에 모두 풀려나왔다.


   열 하루재 되는날 그녀는 거의 미칠것같은 심정을 억누르며 그를 찾아갔다. 그는 코밑과 턱에 수염이 자라나 새카만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하게 쉬어 갈라진 목소리로 그는 돌아가라고만 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그를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그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신념이 그녀를 너무나 슬프게 만들었으므로 그녀는 마침내 해서는 안도리 말을 입밖에 꺼내고 말았다.


  -사랑하고 있어.


  순간 그의 얼굴이 충격으로 하얗게 질려버렸다.


  경찰서를 뛰다시피 달려나온 수연은 한조각의 더위도 느끼지 못하면서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미친 기집애, 정신 나간 기집애, 바보같은 기집애 …‥그러나 아무리 끊임없이 욕을 해대도 자책감이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녀의 내부에 모래알만큼 남아있는 달콤한 후련함 때문이었다.


  일주일이 더 지난 뒤에야 아이들은 풀려나왔고 그들 모두 정상대로 기말고사를 치렀다.


  그녀는 그와 부딪치는 걸 극력 피했으면서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지막 시험을 치는 날 둘은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고 둘 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과 눈이 부딪친건 1초도 되지 않을 순간이었지만 그녀에겐 그의 절벽같은 시선이 내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시험 문제에 집중할 수가 없어 그녀는 연거푸 네다섯번을 읽어 내려갔다.


  겨우 답을 끄적거려 놓고 고개를 들자 그의 자리가 텅비어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답안지를 제출하는것도 잊은채 이마에 손을 대고 자리에서 일서어지 못했다.


  온 몸을 녹여버릴 듯한 더위속에서도 한 여름의 절정은 이미 지나갔다는걸 지는 햇살속에서 느낄수 있었다. 햇살은 프리즘을 통하지 않더라도 많이 탈색되어 있었고 아직은 요란스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도 초여름의 그것처럼 맹렬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게으름뱅이 국민학생이 개학전날에야 밀린 숙제를 해치워 버리듯 새삼스럽게 초조한 마음으로, 그러나 즐거움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기분으로 학교 도서관을 갔다. 2학기 전공에 필요한 정치 서적을 열람표를 뽑아 적어내려가면서 문득 기분좋게 잠이 깨져버린 아침의 일을 상기했다.


  간 밤의 더위로 잠이 들지 못하면서 창문을 열어놓은 탓에 새벽이 되어 한기가 느껴졌다. 멀리 별이 빛나는 것을 행복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그녀는 별 빛이 희끄무레 해지는 것과 동시에 잠이 들었다.


  귓가에서 낯선 동물적인 낌새가 느껴진건 꿈인지 생신지 어슴푸레하다가 새가 삐악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열린 창을 통해 날아든 새는 그녀의 침대 모서리에서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다가 푸드덕 거리며 방안을 맴돌았다. 그녀는 신기한 생각으로 방안을 날아다니는 새를 쳐다보았다. 들어올 때는 컸던 창문이 나가기에는 좁았나보다. 누구의 집ㅈ에서 탈출한 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 자그마한 생물을 자유롭게 놔 주고 싶었다.


  생명에 대한 동경과 아름다움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살아있는 것의 여운을 남긴 채 작은새는 방안을 빠져 나갔다.


  불과 두 세시간 밖에 잠들지 않았었음에도 그녀는 백년쯤의 잠에서 깨어난것처럼 맛있게 기지개를 폈다.


  그녀에게는 이제까지는 없었던 그날분의 하루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분명히 아침의 일곱시였다.


  읽어야 할 책들의 목록을 다 적은 뒤 그녀는 열람실로 향했다.


  책을 찾기전에 그녀는 낮익은 뒷모습 하나를 발견해내었다.


  등을 돌린채 열심히 서가에 꽂힌 책들을 훑고 있는 사람은 진수였다. 잠시였지만 도망쳐버리고 싶은 욕망과 그녀는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가 등을 툭 쳤다. 스스로의 격의없는 태도에 다분히 놀라면서도 그녀는 그 상황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에 내심 안심했다. 그 안심은 그에게도 곧 전파가 됐는지 그녀를 돌아보는 그의 눈동자는 일순 당황으로 흔들렸지만 곧 미소를 띄었다. 그는 오래간만에야 짧게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곧 마주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고 그의 손은 낯선 사람의 손처럼 친절으로만 느껴졌다.


  그녀는 도서목록을 적은 쪽지를 내밀면서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자신의 바쁨을 드러냈고 둘은 그저 과 친구인 것같이 허물없이 돌아섰다.


  그녀의 낯익은 그의 등에 흘깃 시선을 흘리다가 더 이상 절망적이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짚어내고는 놀랐다. 그의 마른 어깨도 반팔 소매밑으로 드러난 다갈색의 그을린 팔뚝탓인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수연은 자신의 마음이 작은 새처럼 좁고 어두운 무엇인가로부터 날아가버린 느낌을 받았다.


  그에 대한 아파했던 마음이 순간적인 감정의 충동이나 치기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자신도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도서관의 열린 창밖으로 끝없이 푸르게 펼쳐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상하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질만큼 맑은 여름의 오전다운 하늘이었다.


  어디선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매미들의 합창 사이에서 간주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불현듯 죽어버린 시계를 고쳐야겠다는 강한 충동으로 꿀꺽 침을 삼켰다. 빌려야 할 책을 대충 고른뒤 그녀는 나는듯이 집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멈추는 일 없이 자기의 삶을 살아나갈 시계가 여전히 일곱시 정각을 가리킨채 정물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


  시계를 벽에서 뜯어내는 그녀의 손은 가벼운 흥분으로 설레기까지 했다.


  그녀는 아직 오월같은 나이 스물이었고 비상하려고 하는 한 마리 작은 새였다. 그녀의 아침은 이제부터는 언제나 일곱시부터 시잘될 터였다.


  집 앞의 유치원에서는 쇠그녀의 마찰음 대신 어린애들의 합창소리가 투명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