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 노조에?

 혜진 : 은식이 형은 노조에서 편집일을 맡았었는데... 왜 신문 만드는거 있잖아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일기도 싣고 결혼 소식도 전하는, 그리고 다른 공장소식이나 야학의 얘기도 전해 주구요.

 어머니 : 야학?

 혜진 : 예, 공장에는 공부를 그만두고 일을 하게된 사람들이 많거든요. 더 공부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공장일 끝내고 모여서 공부하는 거에요.

 어머니 : 그래 우리 은식이가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했어.(한숨)

 혜진 : 글 솜씨도 얼마나 뛰어나다구요.(어느새 은미도 나와서 열심히 듣고 있다)

 은미 : 나도 읽어봤어요, 엄마. 오빠 유품속에 「우리들이」라는 신문이 있어요. 오빠가 쓴 글이 있는데, 우리 섬얘기에요. 엄마랑 내 얘기도 있구요. 읽어 드릴까요? (주머니에서 신문을 꺼낸다. 헛기침) 나의 섬에는 북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에 바다가 넘쳐서 섬이 잠기게 되었을 때 마을에 여민이라는 자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북을 치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함께 모인 사람들 모두가 각자의 북을 쳤다고 생각한다. 단지 여민이라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머니 : 그래, 됐다. 나중에 읽으마.

 은미 : 또 있는데... 하지만 어려워서 잘 모르겠더라. 산재, 실상은 어떠한가

 어머니 : (일어서며 혜진에게)이렇게 계속 섬에 있어도 되나? 공장일은 어떻게 하고?

 혜진 : 예, 이제 올라가면 되요.

 어머니 : (아무 말없이 방으로 들어간다)

 은미 : 또 생각나셔서 저러세요. 꼭 그럴걸 왜 먼저 물어보시나 몰라.

 혜진 : 당연하죠. 어머니신데 영원히 못 잊으실거예요.

 은미 : 정말 언니 안 올라가셔도 돼요?

 혜진 : 올라가야 하긴 하는데 너무 지쳤어요.

 은미 : 무슨 얘기에요?

 혜진 : 사실, 은식이 형이 죽은 뒤, 계속 이래요. 힘도 빠지고, 자신도 없어요. 우리 내려올 때 은미씨도 들었지만 산재랑 은식형 일 끝까지 싸우기로 했잖아요. 아마..., 힘들거예요.

 은미 : 왜요.

 혜진 : 너무 오랫동안 끌어왔어요. 노조가 명분을 찾기 위해 싸움을 내세웠는지도 몰라요. 은식이 형의 죽음이 디딤돌이 되기엔 너무 지쳤어요.

 은미 : 오빠의 죽음이 흥정대상인가요.

 혜진 :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그런건 절대로 아니에요. 난 서울로 가고 싶지 않아요. 난 믿어요. 물론, 우리가 옳다는 거, 그리고 끝내 이기리라는 거. 하지만 그날을 위해 그 지옥으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아요. 그 학대와 억압이 있는 곳에, 죽음같은 육체의 껍데기로 시달리고 싶지 않아요.

 은미 : 난 잘 모르지만, 왠지 화가 나려고 해요, 아니 화가 나요. 거기엔 사람들이 있잖아요. 오빠의 죽음, 그 슬픔 가운데에서도 난 환한 웃음을 보았어요. 그래서 오빠가 행복하게다고 생각했어요. 그 속엔 혜진 언니도 있었어요. 그런데 모두 거짓인가요?

 혜진 : 아니에요. 아니에요. 거짓이 아니에요. 거기엔 기쁨과 자유가 있어요. 헌데, 난 현실을 감당해낼 수가 없어요. 그 두터운 장벽을 내 어깨로 뚫어낼 자신이 없어졌어요. 미안...해요.

 은미 : 내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혜진 : 사람들에게 끌려가 맞은 후 부터에요. 그 치욕에 심장이 뛰고 다리가 후들거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에게 잡혀 차에 태워져 서울 시내를 4시간동안 돌았어요. 온갖 협박과 회유 속에... 정신이 다 나갈 것 같았죠. 그 후엔 깜깜한 방에서 온몸을 맞았어요. 섬유공장에 있었을 때 얘기에요. 결국 그 곳에서 쫓겨나고 아무 대책없이 있다가 기계공장에 간거에요. 사람들이 좋아 함께 일했지만 은식이 형의 죽음이 내게 허망함을 가져다 주었나봐요.

 은미 : ...

 혜진 : 그렇게 치욕을 당한 날 나는 내 자신이 없어져 버림을 느꼈어요. 내가 사람이고 사람인 권리를 지녔다는 것이 없어져 버린거예요. 가끔 작업시간이나 싸움 속에서도 내가 인간일 수 있는지가 의심스러워져요... 괜한 얘기..., 미안해요.

 은미 : 아니에요.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다.)

 혜진 : (함지박과 호미를 들고 나서며) 하지만 일은 해야해요. 그게 사람의 삶이니까. (혜진, 나가려 할 때 형진과 카메라를 멘 지훈 등장. 형진이 은미가 있는 톳마루 쪽으로 가고 지훈과 혜진은 입구 쪽에 서있다.)

 형진 : (은미에게) 어머니를 만나러 왔어.

 은미 : 뭐라고?

 형진 : 시기가 좋지 않다는거 알아. 하지만 넌 사춘기 소녀가 아냐. 감수성에 시달리지 마.

 은미 :l 지금 내가 감정에 끌려서 절제하지 못한다는 거지? 난 그거 하나만으로도 오빠와 결혼할 수 없어.

 형진 : 뭐라고? 너희 집엔 식구가 필요해. 내게도 그렇고 어머니껜 내가 아들 노릇 할거야.

 은미 : 딸이 있는데 왜 오빠가 아들 노릇을 해? 그리고 누구도 은식이 오빠 대신할 순 없어.

 형진 : 은미야 어제 일은 미안했어. 은식일 욕할 생각은 아니었다. 나도 아무 생각없이 내 이익만 찾는 못난 놈은 되지 않을거야. 하지만 우린 우리들의 자리가 있는거야. 거기에서 열심히 살면 되는거야.

 은미 : ...

 형진 : 은미야.

 어머니 : (방에서 나온다) 누가 왔어? 어, 형진이 웬일이야? (지훈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형진에게) 이 시간에 일 안나가고...

 형진 : 저...(결심한듯)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어머니 : (긴장한다) 무슨...

 형진 : 이런 때 말씀드리기는 싫었지만요. 은미가 계속 마음을 못잡는 것 같고... 어머니도 알고는 계셨지만... 은미랑 결혼하겠습니다. 당장 하겠다는 건 아니구요. 이런 말씀 드리는 저의 형편도 부끄럽습니다.

 어머니 : (뭐라고 말을 못한다)

 형진 : 일단 허락만이라도 해주시면... 결혼은 차차 하더라도요...

 어머니 : 글쎄... 갑자기 뭐라고... 요즘 우리집이 이런 얘길 할...

 형진 : 저보다 더 좋은 사윗감을 원하신다면야...

 은미 : (갑자기 단호하게) 엄마. 난 서울 갈거에요. 혜진언니, 언니가 받은 치욕, 그리고 오빠가 받은 설움 모두 갚아줄 거예요. 내가 갈거예요(뛰어나간다) 

 어머니 : 은미야! (절절하게) 혜진 따라 뛰어나가고 사람들 당황, 지훈 착잡한 표정, 이때 무대는 어두워진다.



제 4장


그 다음 날 저녁때이다. 장소는 2장과 같은 북바위 해안이다. 북바위 쪽으로 지훈, 카메라를 세워놓고, 어망을 손질하고 있다. 불이 들어오면 지훈 일어서서 관객들 쪽으로 (그물을 던져 놓으러 나가는 진수네 배를 향해서) 손을 흔든다.

 혜진 : (북바위 쪽에서 호미를 들고 땀을 훔치며 등장한다. 바다를 보며) 아!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바다야. 섬에 와서, 오늘에야 바다를 보았다고 생각하다니 나도 우습군.

 형진 : (왼쪽에서 달려들어오다 혜진을 발견하고 여기 계셨군요. 하루 종일 찾았어요.

 혜진 : 그물 던지러 안 나가세요. 저기 멀리 보이는 배가 진수네 같은데...

 형진 : 은미, 오늘 아침 배로 떠났어요.

 혜진 : (침묵하다가) 알아요.

 형진 : (조금 떨어져 서며) 사실 난 잘 모르겠어요. 내가 결혼 얘길 그렇게 급하게 꺼내는게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고...

 혜진 : (고개를 젓는다)

 형진 : 마치 은미는 여러사람들에 의해서 섬 밖으로 밀려난 것 같군요. 그 사람들은 은식이, 어머니, 나 그리고 혜진씨를 포함할거요.

 혜진 : (당황해하며) 제가 포함된다구요?

 형진 :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혜진 : 전 그저, 내 주위의 사실들을 말했을 뿐이에요.

 형진 : 그 말은 맞아요. 하지만 당신 주위의 사실들은 오직 당신을 중심으로 했을 때만 사실이죠. 당신은 자신의 패배감으로 은미를 목 졸랐어요. 은식이라는 귀한 생명을 구실로 해서 현실을 바로 안다는 건 중요해요. 하지만 의지와 신념이란 과학적이어야 하죠. 은미는 요 며칠간 흥분상태였어요.

 혜진 : 그럼, 형진씨, 당신은 어땠나요? 당신이야말로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변화가 두려웠던 거에요. 그래서 가장 치졸한 이기심으로 은미를 묶어놓으려고 했어요. 은미의 건강한 변화들을 헛된 감정으로 몰아붙이면서.

 형진 : 그래요. 맞아요. 난 은식이와 함께 컸고, 은식이의 성격을 잘 알아요. 평소엔 그야말로 무던하고 순한 놈이었지만 옳은 것에 대한 집착은 우직스러울 정도였지요. 한번은 아주 추운 겨울날 아이들끼리 진수아버님 배에서 작은 고기들을 골라 구워먹은 적이 있었죠. 은식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여서 무척 불우했는데도 끝내 먹질 않았어요. 은식이처럼 은미도 그런 면이 있었죠. 그래서 내게는 멀리 가버릴까봐 두려웠어요. 그 두려움이 은미의 발걸음을 재촉한 셈이 됐지만...

 혜진 : ...

 형진 : 어머니는 어떠신가요?

 혜진 : 아무 말씀도 안하세요.

 형진 : 아니요,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 안하실겁니다. 어머니는 은미의 길을 알고 계셨을거에요. 은미조차 모르고 있는 그 길을... 어머니는 이미 보고 계실겁니다.

 혜진 : 그럴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길도 아시겠군요.

 형진 : 제 말을 믿지 않는군요. 그럼 생각해보세요. 어머니의 눈동자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그리고 무엇을 보고 계신지를.

 혜진 : 어머니가 보시는 걸 우리도 볼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앞서 보시는 그것에 우리가 달려가면 볼 수 있을까요?(거의 혼잣말에 가깝다)

 형진 : (그물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혜진 : 바다가 아름답군요.

 지훈 : (형진, 혜진 쪽으로 다가와서 형진에게 어망을 건네준다)

 형진 : 이게 뭐죠?

 지훈 : 예. 혜진씨 흉내 낸 겁니다.

 혜진 : 네?

 지훈 : (장난스럽게 손으로 혜진의 호미를 가리킨다)

 혜진 : (웃는다. 그러나 곧 착잡한 표정) 이 호미는 아저씨 어망과는 달라요.

 지훈 : (여전히 장난끼 있는 얼굴로 바라본다)

 혜진 : 아저씨의 어망은 정말 흉내일 뿐이니까요.

 지훈 : 그래요? (씩 웃으며 메고 있던 카메라로 혜진을 빨리 찍는다)

 혜진 : 도대체 뭘 그렇게 찍는거죠? 도대체 왜요?

 지훈 : (한참 망설이다가) 그냥 사람들을 찍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을요.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한번 보실래요?

 혜진 : (들여다본다) 

 지훈 : 바다가 보이죠? 한번 눌러봐요

 혜진 : (셔터를 누른다) 이렇게요?

 지훈 : 그래요. 잘했어요. (돌려받으며) 어때요?

 혜진 : 재미있군요. 하지만 너무 멀리 보여요. 렌즈를 통해 보는 바다는 바다이긴 하지만 저기 있는 바다와는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지훈 : 그래요?

 혜진 :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바다는 저기 그냥 있고 멀리 있을 뿐이에요. 멀리 있어 보일 뿐이죠. 혜진, 형진을 바라본다. 형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이 지훈을 바라보자 지훈 씩 웃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암전.




제 5장 - 에필로그

 그 다음날 새벽, 1장과 같은 부두이다. 배를 기다리고 있는 혜진, 어머니, 진수, 진수 부모, 형진이 있다. 불이 켜지면 혜진 자유롭게 사람들에게 인사한다. 혜진의 손을 잡거나 어깨를 톡톡치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다.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진행되어 혜진의 귀로가 출발로서 상징적이어야 한다.

 혜진, 어머니 마주선다. 오래 바라본 뒤 뜨겁게 포옹을 한다.

 혜진 : 어머니 다시 올께요. 걱정만 끼쳤어요. 은미씨 걱정마시구요. 제가 은미씨 만나면 꼭 연락할께요.

 어머니 : 은식이를 보내고,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나도 은미가 꼭 돌아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흩어지지 말고 열심히 하거라.

 혜진 : 짐을 챙겨나가려 할 때 지훈, 급히 등장한다.

 지훈 : 혜진씨, 같이 가요. 잠깐, 기념 촬영 좀 하구요.

 사람들, 어색해 하며 나란히 선다. 지훈, 카메라를 세워놓고 열심히 맞춘다.

 진수부 : 아, 어서 찍어.

 지훈 : 아, 저도 찍혀야죠. 지훈이 급하게 달려와 구도 속에 서면 셀프 타이머(Self Timer)가 경쾌한 셔터소리를 낸다. 이때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리며, 서서히 암전된다. 극을 마치는 징소리가 들린다.


김주현(철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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