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와 C가 적당히 분포된 성적표가 도착한 이후, 갖은 아양과 맹세를 거듭하면서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간신히 등록금과 훈계를 받으며 시작된 개강일! 아침마다 배달되는 H신문을 들고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학교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북적이는 인파들. 머리위로 잡지광고가 눈에 띄었다. 끝없이 「야한 여자가 좋다.」는 마교수와 누구보다도 야하다고 자부하는 글래머 여배우의 대담......


  지루한 승차시간을 알차게 보내고자 신문을 펴들었다.

그러나 가장 진보적인 신문을 본다는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사회면, 문화면, 만화를 보고 나니 더 이상 활자가 눈에 안 들어왔다. 할 수 없이 그 때부터는 조촐하게나마 명상의 시간을 갖게 됐다.


  나의 명상은 이제 30분만 지나면 만나게 될 친구들과 나누게 될 대화에 대한 상상으로 메꿔 지고 있었다. 「여행을 하겠다던 형미, 전공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던 미영, 남자친구를 사귀겠다던 숙희 모두 어떻게 지냈을까? 많이 성숙했겠지.」


  이윽고 시청역. 그많은 인파가 삽시간에 밀려 나가고 지하철이 정상체중을 되찾은 바로 그때, 승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내쪽으로 등을 돌린 채, 진짜 야한 여자가 서 있었다. 미니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검게 그을은 피부의 길고 예쁜 다리, 뿌러질듯한 힐에 긴 퍼머머리가 치렁치렁한 그녀는 그로테스크한 메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으로 「XX스포츠」를 들고 「발발이의 추억」과 「오늘의 운세」를 진지하게 탐독중이었다.


  드디어 『이번 정차역은 이대』가 명령처럼 떨어졌을때 그녀도 몸을 돌려 문앞으로 다가왔다. 역시 우리학교 학생이었다. 흘끗 본 옆얼굴도 진한 화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 소녀는 소박하다 못해 잔뜩 주눅들어있는 내게 다행히도 눈길한번 주지 않았다. 그때 난 속으로 「저 여잔 아마 H신문을 안 읽을 거야.」하며 스스로 위안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리곤 문이 열리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녀의 앞을 막 앞 질렀을때 누군가 뒤에서 「영주야!」하며 등을 두드렸다.


  뒤를 본 순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름 아닌 그녀가 아닌가? 게다가 함박웃음까지......멍한 시선을 띄우고 있는 내게 그녀가 「나야 나!」라고 부연했을 때, 그목소리의 주인공인 그녀는 다름 아닌 미영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생겨난 그녀의 쌍꺼풀을 확인한 순간 난 지갑을 꼬옥 움켜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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