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의 입문서격인 어느 책속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브라질의 한 주교가 성전앞에서 실신 지경의 어린 것들을 데리고 있는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주교는 부인에게「젖을 먹여보시오」라고 여러차례 권고했다. 부인은「젖이 안나와요」라고 되풀이 대답하다 결국 피가 흐르고 있는 자신의 유방을 드러내보였다. 그 때에 어린 것들이 난폭하게 달려들어 피를 빨아 먹었다. 그 부인은 자신의 피로 생명을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주교는 부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약속을 한다. 비참한 현실이 있는 한 적어도 매일 굶주리는 사람 하나에게 음식을 주겠노라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광경은 비단 브라질에만 있지 않다. 세계 곳곳에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있다. 참담한 현실이란 단지 배고픔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 경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배고픈 사람들은 적어졌다. 하지만 배부름 속에 가리워진 모순구조는 상대적으로 배고픔보다 더한 불평등을 낳았다.

 종교란 이러한 현실에 바탕하지 않는 것인가?

 요즘의 일부 종교인들은 호사스러운 계급을 자처하고 있으며 여타의 현실은 모른 척 해버린다. 또한 종교인이 정치성을 띠는 것은 그들 순수한 신앙심을 더럽히는 것이라며 금기시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권력과 금력을 지닌 자에 대해서는 신의 가호를 기원해주기도 한다. 반면 민중에게는 어려운 현실에 불만을 갖지 말고 부단히 참아내면 행복한 내세를 맞을 것이라고 교시한다.

 종교인의 올바른 신앙이란 어떤 것인지. 민중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고, 현실을 외면하고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것일까?

 요즘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종교인의 도덕성을 문제삼을 생각은 없다. 그저 양적으로 성장해온 종교가 비참한 현실 앞에서 사랑실천의 신앙심을 발휘한 브라질주교와 같은 종교인들로 인해 질적으로 발전하길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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